세 시간 반 동안 A4 용지 세 장이라니 1시간 넘게 한 장 왓 더 훡 논증하면서 쓰래서 존트 오래 걸린 것도 걸린 거고 일단 쓰고 피곤해서 뻗었다가 지금은 지각이다. 어차피 지각한 김에…… 레폿 세이빙. 보르헤스랑 파블로 네루다 얘기가 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므로 도서 밸리로.
현실에 살아있는 비현실의 텍스트
― 라틴 아메리카의 전복적 사고에 대해서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해 얘기할 때면 흔하게 마술적 상상력 혹은 환상성에 대한 논의가 튀어나오곤 한다. 서구적 사고에 기반을 두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복적 사고를 하는 라틴 아메리카.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는 마꼰도의 세계, 대자연의 환상이 살아있는 세계로 이해된다. 하지만, 환상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건 현실성에 발을 딛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물 위로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그것을 환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들이 발생해야만 그 환상성이 의의가 있을 수 있다. 고딕 소설들이나 기괴 문학들은 그런 방식으로 문화의 은폐된 부분을 이야기해왔다.
때때로 ‘은폐’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문화적 가장자리 자체가 중심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는 흔히 떠오르는 기존 서구 사고를 전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은폐된 부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환상성을 적용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현실’의 편에 선 사람들이 이 문화적 가장자리를 이해하기 위해 환상성을 적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기존의 사고를 새로 읽고,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는 라틴 아메리카 텍스트 세 가지를 중심으로 ‘환상성’과 ‘실재하는 세계’에 대해 논의를 풀어나가도록 하겠다.
호아킨 가르시아 토레스의 그림은 기존의 지도를 새롭게 읽어냈다. 이 그림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라틴 아메리카 지도는 반대로 되어 있어야 정상이다. 단지 지도를 뒤집는 것만으로 이 그림은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냈다. 라틴 아메리카가 인식되는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공간을 없애지 않는다. 지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지도 안의 내부 세계는 새로운 질서로 구축되어 있다. 서구의 지형적 프레임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의 지형적 프레임을 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둥그런 지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이 그림을 통해서 관객은 북반구의 사람들과 남반구의 사람들이 서로 발을 맞대고 서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한다. 지도가 구축한 새로운 질서는 그 내용 역시도 다르게 풀어낸다. 인간 역시도 그 자신이 서 있는 환경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질서들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나 질서 역시도 새롭게 인식되어야 한다고 이 그림은 주장한다. 그것은 새롭게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 『아스테리온의 집』 역시도 기존 텍스트를 새롭게 읽어내는 데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아스테리온을 해치운 영웅 테세우스의 시점이 아니라 아스테리온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서술한다. 영웅 테세우스의 괴물을 해치우는 이야기는 아스테리온을 중심에 두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살해한 테세우스가 아닌 살해된 아스테리온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걸 뚜렷하게 인식할 뿐이다. 이 영역은 분명히 실재하는 영역이지만, ‘현실’에는 존재하는 영역이 될 수 없다. 현실과 환상은 대치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시점을 뒤집었을 때 이미 이 이야기는 현실의 틀밖에 존재하게 된다.
얼핏 보았을 때, 이런 텍스트들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발로로 보이기도 한다. 서구적 프레임 속에서 많은 걸 희생당한 것처럼 보이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현실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직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텍스트들은 ‘현실’이 아닐 뿐 충분히 실재한다. 굳이 우리가 뒤집는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존재해 왔던 것들이다. 아스테리온을 테세우스가 살해했다면, 살해당한 아스테리온은 당연히 그 자리에 존재했다. 라틴 아메리카 지도를 뒤집는다고 해서 라틴 아메리카의 생김새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 영역은 저항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운 낯선 세계의 존재 그 자체다.
이 영역이 현실과 대치되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라는 좋은 예를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 <마추피추의 산정 12>에서 볼 수 있다. 에서 시인은 마추피추의 위가 아닌 아래에서부터 사고한다. 마추피추 아래에 묻힌 땅속의 원주민들에서부터 땅 위의 세계로 올라온다. 또한, 시인은 ‘그대들의 죽은 입을 통해 말하러 왔다.’라고 기술한다. 죽은 입은 당연하게도 말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말을 하는 통로로 죽은 입을 선택한다. 이것은 말을 해야만 하는 존재들이 죽은 입이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말을 해야만 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떠올린다. 이 텍스트 역시도 기존 질서를 뒤집어서 새롭게 읽고 있다. 단순히 새롭게 읽는 것뿐만이 아니다. 오랜 옛날 사라졌을 원주민들을 말하게 한다는 건 완전히 환상이다. 시인은 있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함으로써 그 일이 있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지하에서 죽은 입들이 포문을 열게 하겠다는 것 역시도 새로운 인식의 출발이다. 그것은 그들이 말해야 한다는 명제를 관철함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된다.
어떠한 사회에 새로운 질서가 선다는 건 그 사회의 총체적 변화를 의미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변화를 겪으면서 서구의 모든 사회가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새로운 질서는 질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질서가 구축될만한 사회적 바탕이 그곳에는 존재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메커니즘 자체가 이미 서구적 프레임의 지구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닌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아스테리온의 집』에서 아스테리온의 세계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는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 그에게는 미로 전체가 끝없는 반복으로 구성된 무한한 세계다. 그는 미로 밖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반복일 뿐이며,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태양과 자기 자신뿐이다. 아스테리온의 세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스테리온의 현실이다. 아스테리온은 괴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다르게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을 악과 동일시하며 자신을 이 끔찍한 생에서 구원해 줄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 미로가 땅 위에 서 있다는 명제 자체는 미로 밖에서 아스테리온을 보는 사람과 미로 안에 있는 아스테리온에게 다르지 않다. 같은 물질적 조건 위에서 아스테리온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성했다. 아스테리온의 이야기가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 되는 건 아스테리온의 세계가 ‘환상’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스테리온의 세계는 분명히 현실에 존재함에도 현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받아들여질 수 없어서 이것은 초자연적인 영역에 남아있게 된다. 이 세계의 법칙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결국, 아스테리온은 일상적 세계에서 유리되면서 시공간적 개념을 뛰어넘은 초자연의 세계 자체로 새롭게 완성된다. 그것이 바로 환상이다.
호아킨 가르시아 토레스의 그림도 이 환상의 메커니즘 자체에서는 아스테리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그림은 똑같은 지도다. 뒤집어 놓기만 하면 우리가 보는 일상적인 지도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뒤집어 놓았기 때문에 이 그림은 일상적인 지도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단지 뒤집어 놓은 것만으로 이 지도에 나온 장소는 ‘다른 장소’가 된다. 호아킨 가르시아 토레스가 만난 세계와 우리가 만난 세계가 같은 물질적 공간에서 얼마나 다른 지평을 가졌는지가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그 지도에 그려진 세계는 이미 일반적으로 지도에 나타나서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라틴 아메리카와는 다른 곳이다. 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루과이 라운드와 한-칠레 FTA의 라틴 아메리카는 될 수 없다. 이 라틴 아메리카는 일상적인 라틴 아메리카가 아니다. 일상적인 세계에선 어느 정도일지 어림하기 어려운 새로운 세계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따로 돌아가는 환상적인 세계다. 실재하는데도 실재적인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뒤집힌 세계의 의미는 뒤집히지 않은 세계에 의해 규정된다. 아스테리온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실재하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 세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전복적 사고들을 환상으로 규정짓는 건 서구적 프레임을 자아로, 전복적 사고를 타자로 규정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타자화는 단지 타자화로 끝나지 않는다. 전복적 사고는 환상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환상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아스테리온도 그 자리에 존재했고, 라틴 아메리카의 생김새도 다르지 않으며, 마추피추를 쌓은 원주민들 역시도 존재했던 것처럼. 환상적이라는 것은 실재적인 것과 대화한다. 또한, 그 실재적인 것과의 대화 자체가 환상적인 것의 일부가 되어 있다. 때때로 어떤 경우는 그 대화 자체이기도 하다. 호아킨 가르시아 토레스의 그림이 보여주는 환상성의 경우는 실재적인 것과의 대화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계속해서 ‘실재’의 개념을 환기시킨다. 파블로 네루다의 <마추피추의 산정 12>에서 환상은 끊임없이 실재를 심문한다. 이 시에서는 말을 해야 할 사람들이 말을 하지 못하고 죽은 입이 되어 있다. 이 현실에 대해 시인은 죽은 입들을 소환하는 환상을 통해 계속해서 실재에 반문한다. 그렇게 이 환상은 죽지 않은 입들에 대해 환기시켰다. 시인은 자신을 울게 내버려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투쟁을 다오, 강철을 다오, 화산을 다오.’라고 노래한다. 죽은 입들을 대신해서 시인은 강철같은 투쟁을 전개한다. 강철과 화산이 논해진다는 것은 이미 그 죽은 입들이 시인에게 통로를 제공해서 현실로 소환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실재의 개념과 대치되는 환상성의 힘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독특한 전복적 사고는 일반적인 환상의 개념에서도 상당히 벗어나 있다. 서구의 환상적 텍스트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 사회에서 배제당한 것들을 공포의 상징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이 환상적 텍스트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 사회를 뒤엎을 위험이 있는 것들이 사회에 저항할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에 반해 이 세 가지 텍스트를 기초해서 살펴본 ‘환상성’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환상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다. 다만, 환상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거나 말해선 안 될 것들 앞에서 망설이게 하지 않는다. 현실의 맥락이 있지만, 뒤집힘으로써 여기에선 오히려 사회 일반의 현실적 개념에 대해 반명제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들의 전복적 사고에 대해 반명제라고 말하는 것 역시 매우 조심스럽다. 명제가 있기 때문에 반명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의 환상성은 결코 환상성이 아닐 수 있다. 전복적 상상력은 ‘전복적’인 실재일 수 있다. 거꾸로 된 세계를 읽어내는 사람에게는 거꾸로 되지 않은 세계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P.S
그러나 저는 사실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각 사람에겐 각각의 세계가 어느 정도는 존재할 수 있겠지만, 사회는 변화하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에너지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세계 역시 무한정한 반복에 기초한 미로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 사회 변혁도 그냥 반복일 뿐이겠지요.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에서 학자와 노인의 토론 장면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학자는 세계에는 다양한 메커니즘이 존재하고 각각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단선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계속 노인을 설득하려고 하는데, 노인은 반복해서 한마디밖에 하지 못하는 장면입니다. “제가 아는 건 세상에는 프롤레타리아랑 부르주아라는 두 계급이 있다는 건데…….” 당신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서 학자는 화를 내고 가 버리지만, 노인의 삶에선 두 계급이 확실하게 있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학자가 가 버린 후에 노인은 “내가 뭐 말을 잘못했나? 프롤레타리아랑 부르주아가 있잖아요?”라고 옆 사람한테 말을 건넵니다. 옆 사람이 노인의 말을 긍정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말과 목소리로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걸 밀어붙이다 보면, 뭐가 옳은지 더는 구분할 수 없지 않을까요.
마지막에 가서 소심하게 저항-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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