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의 문 앞, 독거의 마음 오늘 날씨

2년 간의 동거를 마치고 시작한 1년 간의 독거생활이 슬슬 끝나간다. 끝나간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나는 토요일부터 새 동거를 시작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삿짐센터에 전화에서 두 방에 있는 물건을 합쳐서 포장이사를 하는 데에 드는 가격을 물어봐야 한다. 요 며칠 계속 이 방에 들어와서 살아 온 1년이 스쳐지나 기이한 기분이다.
 
집에서 나와 살면서부터 대체로 나는 동거를 했다. 가난한 집에서 그다지 부모가 달가워하지 않는 독립을 하는데 보증금 따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읽은 소설 속 미래사회가 보증금도 월세도 없이 모두에게 무상으로 주택을 제공하는 걸 보고 나는 21세기에 살아가고 있다는 게 매우 억울했었다. 물론 현실 22세기가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이야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계속 ‘같이 살’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번 독거 직전의 동거는 2년 동안 군대를 갔다 온 애인과 집을 합친 것이었다. 나는 마침 대학원을 수료했기에, 그의 학교와 가까운 회기동으로 집을 옮겼다. 방은 원룸이었고 1인용 침대가 있었다. 그가 군대에 가기 전에 했던 반 년 간의 동거 생활 동안에도 그와 나는 1인용 침대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잠자리는 한 뼘이면 충분하다’는 <한여름밤의 꿈> 속 라이샌더의 대사를 생각하며 이 상황이 매우 로맨틱하다는 망상에 빠지기도 했다.
 
동거의 가장 중요한 장점은 역시 외롭지 않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 2년 간의 동거 내내 욕실 문을 열고 수다를 떨면서 샤워를 했다. 집 안에서 나는 언제나 무언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재미있는 걸 발견하면 바로 애인을 불러서 함께 감상하였다. 애인이 좋아할 법한 음식들을 해서 때때로 같이 밥을 먹는 것과 그가 내게 카레처럼 쉽고 간편한 요리를 해 주는 것이 모두 즐거웠다. 먹는 것과 자는 것을 공유한다는 것은 굉장한 친밀감을 기반으로 하는 일이다. 높이가 영 맞지 않는 작은 텔레비전을 같이 보는 것까지도 좋았다. 나는 집에 들어오면 ‘가정집 분위기’를 내겠다며 공중파 프로그램을 틀어놓곤 했다. 그건 마치 소꿉놀이 같았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동거가 소꿉놀이가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방금 또 집주인에게 제발 청소 좀 해 놓으라고 이런 상태로는 집이 안 나간다고 잔소리를 들은 나의 청결수준은 구남친의 청결수준과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결벽증이라고 짜증을 냈고, 그는 내게 왜 청소를 하지 않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내가 밥을 먹고 혹은 커피를 마시고 바로 설거지를 하지 않는 걸 이해할 수 없어했고, 나는 청소기 소리가 너무 싫어 고양이를 끌어안고 침대 위로 대피해 있곤 했다. 내 고양이의 날리는 털에 대해서도 나는 ‘고양이랑 살면 털 날리는 거 어쩔 수 없는 거지’ 정도의 안이한 청결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옷을 (정확히는 자신의 옷만을) 매우 열심히 옷장 안에 집어넣었다. 물론 고양이의 귀여움에 고양이를 베란다에 별거해서 키우자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 계획은 지금도 정말 도무지 절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베란다는 춥고 동물은 가족이라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물네 시간 중 열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만큼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가지고 왔다. 그가 다른 데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돌아와도 나는 그의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그건 아마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의 짜증을 지켜보는 게 고통스러웠고, 그는 나의 우울을 지켜보기 힘들어했다. 그러다보면 짜증도 우울도 한층 더 심각해지기 마련이었다. 작은 갈등상황에도 나는 깊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했고, 그는 분노할 때마다 점점 그 분노를 제어하기 힘겨워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같이 살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내 고양이가 그에게 맞은 날, 나는 그와 떨어져 사는 게 옳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일단 나는 돈이 없었다. 그와 싸우고 나서 나는 종종 그의 집 현관 앞 복도에 누워 잠을 청했다. 물론 너무 추워서 잠이 들 수는 없었다.
 
내가 낸 책의 인세가 입금되고 나서 나는 그 돈을 밑천 삼아 그에게서 독립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작년 이맘때쯤, 나는 독거 생활에 돌입했다. 나는 집에 나 혼자 있는 시간들이 숨이 막히도록 행복했다. 드디어 내게도 온전한 내 방이 있었다. 텔레비전을 틀었고 집에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셨다. 영화를 보다가 피우고 싶을 때 담배를 피웠고 혼자 사는 성인여성답게 바이브레이터라도 살까 고민하며 성인용 쇼핑몰을 뒤져보기도 했다. 그에게서 독립한지 한 달 남짓 지났을 때 우리는 결별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는 내 독거생활에 지쳐버렸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내가 독거생활을 꿈꿨던 가장 큰 이유는 엄마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나의 어머니는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트리를 설치하고 계절마다 침구를 갈고 반찬은 그릇에 담아 내놓으며 상에는 삼첩 이상의 반찬이 올라가고 구겨진 옷은 다리고 집안을 항상 청결하게 유지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내 방에 들어왔다가 방 꼴을 보고 울음을 터뜨린 이후 다시는 내게 청소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만든 김치찌개를 좋아했다. 엄마는 내가 불 꺼진 부엌에 허리를 숙이고 서서 시궁쥐처럼 젓가락만 들고 김치찌개 건더기를 건져 먹는 걸 싫어했다. 내가 김치찌개를 그렇게 먹고 있는 걸 보면 엄마는 부엌 불을 켜고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굳이 그 수고를 마다 않으며 김치찌개와 밥을 차려주곤 했는데, 김, 김치찌개, 나물 하나까지 정갈하게 차려진 그 밥상을 보면 나는 식욕이 뚝 떨어졌다. 나이가 들어도 그 버릇은 없어지질 않았다. 고등학교 동창과 둘이 살고 있을 무렵 일하던 토킹바에서 나는 토킹바 냉장고에 들어있던 김치를 집어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어쩌다 사장이 밥을 사주면 폭식을 했다. 복 없이 먹는다고 잔소리를 들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바 부엌에 덫을 놓아서 쥐를 잡으면 차마 뜨거운 물을 부어 죽이지 못하고 까만 비닐봉지에 넣어 밖에 내놓았다. 죽을 거라는 걸, 어쩌면 분쇄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고통스러웠다. 아마 나처럼 그냥 김치나 먹고 싶었을텐데.
 
그 당시는 개인적으로도 크게 고통스러웠을 때라 언젠가부터는 내 손목을 스스로 칼로 긋는 정도로까지 몰렸다. 혼자 있으면 울었고 집에 있으면 잤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삶을 견딜 수가 없어서 고통스럽다는 얘기를 불쑥불쑥 SNS에 올렸다. 그러다가 몇몇 끔찍한 사건들을 겪기도 했다. 청소도 하지 않았고 밥도 먹지 않았다. 하루에 술을 마시는 한 끼 정도를 먹었다. 이 더러운 방에 사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어떻게든 순간적인 행복감을 제공해 내 삶을 연장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김치가 먹고 싶다는 말을 별 생각 없이 인터넷에 올렸다. 영광에 살고 있는 지인이 김치 정도는 보내줄 수 있다며, 내게 반찬들을 보냈다. 반찬을 받고 나서 나는 입이 떡 벌어지도록 놀랐다. 원래 그녀가 손이 큰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1인 가구 우울증 환자가 보기에 그 반찬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손이 많이 간 정성스러운 반찬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반찬들을 그냥 무작정 먹어치우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반찬을 집에 있는 모든 그릇들에 다 옮겨 담았다. 이 반찬들에 국이 없다는 건 너무 어색하다는 생각에 국까지 끓여서 예쁘게 사진을 찍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음식을 보내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함께 소설을 쓰는 동료 중 한 명은 강원도에서 손수 생산한 맛있는 피망과 고추들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 피망과 고추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보내준 사람들의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이것들을 ‘맛있게’ 먹어야만 했다.
 
그날부터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나는 무엇을 먹고 싶은지를 생각해냈다. 집에 반찬도 많겠다, 처음에는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해장용 콩나물국, 오징어찌개, 배추무국. 고등어 살을 하나하나 발라내서 고등어 밥을 해 보기도 하고, 고등어 조림을 해 보기도 하고, 갈치를 구워보기도 했다. 바지락을 사서 오일 파스타를 해 보기도 했고 꼬막을 사서 꼬막을 무쳐보기도 했다. 집 앞 마트 뿐 아니라 좀 더 멀리 있는 재래시장까지 진출해서 재료들을 샀다.
 
요리를 하다 보니 부엌은 금방 지저분해졌다. 양파를 산처럼 쌓아놓고 또 파를 썰 수는 없었기에 나는 부엌을 치우면서 요리를 했다. 한 칸짜리 싱크대 위에서 이리저리 재료들을 담아놓고 가스레인지 앞에 여러 양념들도 구비해놓았다. 생강을 넣어 돼지 누린내를 없애고 청주를 마시는 대신 음식에 넣는 사치도 부려보았다. 설거지는 매우 귀찮은 일이었지만 매일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매일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밥을 먹는 동안 고양이 털이 음식 위로 날아다니는 게 힘들었기에 청소도 했다. 방 안쪽부터 바깥쪽까지 쓸어낸 다음에는 행주로 상을 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그릇 가게를 지나가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면기(麵器)를 샀다.
 
속이 깊이 파이고 입구가 넓은 그릇이었다. 그냥 국그릇에 담아먹을 수도 있고 냄비에서 덜어먹을 수도 있는 면을 예쁘고 맛있게 먹기 위해서 굳이 더 많은 소비를 한 셈이다. 흰 면기와 투명한 맥주컵을 사 오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일렁거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할 생각도 없었던 이상한 쇼핑이었다. 그냥 때가 탄 머그컵에 맥주를 마셔도 괜찮을텐데.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나를 더 사랑해도 되는 것이었다.
 
그 사이 집을 다 둘러보고 간 이삿짐센터에서는 내 짐이 0.6톤 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이라는 비좁은 동네에서는 1톤에 다 담기지 않는 작은 살림살이로도 나만한 계집애가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취직을 했고 내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친구를 만나고 월급을 받으면 새 옷도 산다. 그리고 요리를 할 때마다 김치를 그릇에 옮겨 담는다. 또 엄마를 생각한다. 1년 간의 독거생활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결국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소•빨래•요리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적 행동이다.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왔지만 자신과 친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일상적 노동을 수행해 온 1년이 지나자 나는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열아홉 살 때 나는 간절히 스물아홉 살이 되고 싶었다. 그때쯤이면 나는 삶의 요령이 단단하게 생겨서 내 삶의 고통들을 모두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제 그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어떻게 해야 마음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이번 주 토요일부터 나는 새 연인과 새로운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얼마 전에는 책을 주겠다던 동네 주민인 친구에게서 상당한 양의 책을 받아 왔다. 나는 무겁다고 징징거리지 않고 책이 가득 찬 트렁크 두 개를 덤쑥 들어올려 집에 밀어 넣었다. 새 연인은 입이 그리 까다롭지 않아 나는 여전히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요리해도 될 것이다. 청결문제에서도 그렇게까지 까다롭지 않다는 것은 정말로 다행한 일이나, 독거생활을 거친 나는 이전보다는 더 강해졌으리라. 집세는 37만원에서 27만원으로 줄어들었다. 공동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텔레비전을 볼 것이다. 더 넓어진 부엌에서 신나게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 말대로 온 만큼을 더 가면 난 거의 예순 살이다. 숨 쉬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되듯이 마음의 운동도 그만두면 근육이 퇴화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수고가 많겠지만 이 1년간 그대로 수고가 많았다. 독거의 마음으로 새 동거인을 기다리는 건 긴장되고 떨리지만 또 씩씩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밤에 자기 위해 누울 때마다 마음 속에 속살대는 목소리. 이사 가자, 우리 예쁜 서영이.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