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 '사법적' 행위는 언제나 관심을 끌어왔고 계속해서 관심을 끈다. 법 장치와 위법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과 자세(이들은 언제나 불신에 차 있었고, 이 때문에 사립 탐정이나 아마추어 탐정의 인기가 치솟았다)는 여러 방식으로 변화했거나 적어도 다양하게 윤색되었다. 위대한 범죄자는 법 장치보다 더 우월한 존재로 표현되는 때가 많았고, '진정한' 법의 대표자로 나타나기까지 했다.

*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자베르는 대중적 심리의 관점에서 볼 때 흥미로운 인물 유형이다. 자베르는 '진정한 법'의 관점에서 잘못을 저질렀지만, 위고는 그를 동정적으로 묘사하여 '추상적' 의무에 충실한 '인격자'로 추어올렸다. 아마도 자베르에게서 경찰관이 '존경스러울' 수 있는 전통이 생긴 것 같다.

* 문제는 이것이다. 범죄소설은 왜 인기를 누리는가? 그것은 비예술적인 문학이 왜 인기를 누리는가 하는 더 일반적인 문제의 특수한 양상인가? 범죄소설이 그렇게 인기를 누리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실질적이고 문화적인(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반적인 대답은, 대략적인 한계가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주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인 문학이 인기를 얻는 것도 역시 실질적이고 도덕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인가?

* 처음부터 미적 감정 때문에 책을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관객이 흥미를 느끼게 되는 요소 중 미적인 감정이 차지하는 비율은 가장 적다. 다른 요소들 대부분은 지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상적인 것, 예를 들면 '성적 유혹' 같은 것이다. 문학 대본은 어렵지 않아야 하고 심리적인 탐구는 배제되어야 한다. 표현된 정열은 가장 근원적으로 '인간적'이고 직접 경험한 것(복수, 명예, 모성애 등)이라는 의미에서 '기초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한다.

* 인간의 활동이 언제나 테일러화되어 있었고 엄격하게 규율화되어왔다는 사실. 또 인간은 자신을 짓누르는, 실재하는 조직화의 협소한 한계로부터 꿈과 환상을 통해 탈주하고자 해왔다는 사실. 인간이 집단적으로 창조한 가장 큰 모험, 가장 큰 유토피아, 가장 위대한 '종교'는 '현세'에서 탈주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 문제는 모험의 쇠진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과도한 모험성, 즉 실존의 과도한 불확정성에 있다. 그러한 불확정성에 맞서는 개인적인 방어책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따라 '추하고' 불쾌한 모험을 거부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 때, '멋지고' 흥미로운 모험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 자신을 우월하게 유지하는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을 받으려는 욕망,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의 개설을 고양하려는 욕망, 삶의 조건들에서 가능한 만큼보다 더 많은 세계와 사람들을 알고자 하는 욕망

* 대중은 더욱더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지만, 아직은 대중으로 남아 있다. 대중 스스로에게 내재하는 자발적인 재구성의 씨앗을 싹틔우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렇게 나아가는 것이 오히려 '대중'에서 '프롤레타리아트'로 몰락하는 것은 아닐까?)

* 오늘날 대중 소설은 소위 유미주의자들의 문학으로 변한 문학에서 점점 더 분리되어간다. 대중에서 분리된 문학은 말라 죽는다. 정신적 생명을 박탈당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자존을 잃는다(문학이 대중에게서 멀어질 때 문학은 특권계급의 현상이 된다. 그러나 이는 대중의 더 큰 자존심을 동반한다.)

* 그리고 우리 주변에 대중의 부재가 점점 확산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 기근에 대한 해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심문을 당하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데도 압박을 받으며, 그로 인해 당연한 듯이 고통받는다. 거대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 없고, 공장 밖에 있는 지식인은 그 공장을 침입할 수 없는 무풍지대로 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 연재 소설은 대중의 공상을 대체하는 (동시에 조장하는) 하나의 백일몽이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 학자들이 백일몽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보자. 이 경우 대중의 공상은 (사회적) '열등감의 콤플렉스'에 따라 좌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콤플렉스는 금지된 죄악을 저지를 사람들에 대한 형벌과 복수를 꿈꾸는 오랜 공상을 받쳐준다.

* 만초니가 볼 때 대중에게는 '내적인 삶'이 없으며 깊은 도덕적 개성도 없다ㅏ. 대중은 '동물'이며 만초니는 가톨릭 동물 보호 단체 같은 것이 취할 법한 자선의 마음으로 대중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 대중 독자가 대중 문학에 대해 갖는 가장 특징적인 태도들 중 하나는, 작가의 이름과 개성보다 주인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한 유형의 최초의 창시자[작가]는 자기 작품에서 주인공을 죽게 하지만, 이를 이어가는 '연재 작갇들'은 그 주인공을 다시 살려내 독자의 새로운 열광과 만족을 이끌어내고 주인공에게 주어져 있던 이미지를 새로운 내용으로 연장하면서 주인공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 유럽적 감수성은 낭만적 흐름을 이끌어낸 바 있다(이러한 사실은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의 대중성과 연결할 수 있다. 거기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 기저에 깔려 얽히는 열정들 - 질투, 부성애, 복수 등 - 은 본질적으로 모든 나라에서 대중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 민속적인 것은 모든 측면에서, 다시 말해 '배타주의적'인 측면과 시대착오적인 측면과 보편적(적어도 유럽적) 특징이 결여된 계급의 측면에서 '지방적인 것'에 가까이 다가선다. 예를 들어 멜로드라마의 언어는 민속적이며, 마찬가지로 연재 소설의 기운을 받은 감성과 속물적 '몸짓들'도 민속적이다.

* 전기 소설은 우월한 문화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혹은 갖고 있다고 믿는 독자와, '지배 계급'과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고 믿는 시골 그리고 도시의 소부르주아를 지향하는 것이다.

* 문학가는 반드시 정치가보다 세밀하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전망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덜 '분파적'이어야 한다ㅏ. 그러나 '모순적'인 방식으로 그럴 필요가 있다. … 앞에서 본 문학 집단들이나 그들이 표현하는 조화들이 오히려 실제적일 수 있다. 여기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개혁의 발전이 모든 사회 계층에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유일한' 진보적 노선의 관점에 선다는 것은 커다란 오류다. 진보적인 흐름을 통할 때 모든 획득이 축적되고 그 모든 다른 새로운 획득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노선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가장' 진보적인 노선에서도 뒤처진 걸음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 새로운 문학은 지적·도덕적 개혁의 표현이므로 새로운 문학이 동반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대중 문학ㅇ에 대한 문제 의식으로 나타난다.

* 대중문학에서 '초인'이 당대 현실의 삶과 관습(소부르주아와 소지식인은 특히 그러한 낭만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았다. 낭만적 이미지는 그들의 아편이자 인공적인 파라다이스로서 당시 현실의 직접적인 삶의 불행과 속박과 대조된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백 년을 양으로 사느니 하루를 사자로 사는 것이 낫다." 이 격언은 어쩔 수 없이 양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얼마나 많은 양들이 이렇게 말했을까. "아! 내가 하루라도 그런 힘을 가졌으면!"

* '초인'의 대중적 특성에는 연극적이고 외적인, 다시말해 초인보다는 '프리마돈나' 식의 요소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것은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형식주의와 최고 계급이고자 하는, 특히 그렇게 기억되고 선언되기를 바라는 유아적 야망이다.
(이를테면 여성의 경우에는 엄청난 미녀. 아름다움이 자신을 우등한 계급으로 진입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 미래파는 지식인들을 향한 대중적인 찬미의 양상이다.

* 타자를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세계와 가치를 지닌 자율적인 존재로 대할 때, 이를 통해 어느 한쪽이 중심 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변증법적인 고나계에 놓일 때 헤게모니의 창출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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