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ㅏ수다>, 좋고 지루한 세상에 대해 평이한 문화생활

경쟁, 좋고 지루한 세상에 대해




하나


그들만 가수가 아니다. 이미 만인이 가수고 만인이 심사위원이다. 영국이 탤런트를 가지고 있고 미국이 아이돌을 가지고 있다더니 한국은 슈퍼스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가수들도 자신이 가수라는 걸 증명해야 할 시기가 왔다.


내 애인은 군대에 가 있는데, 그곳에 갇힌 군인들은 <나는 가수다>를 매우 열심히 보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에 면회를 갔을 때도 면회실의 군인 한 명은 <나는 가수다>의 레퍼토리를 메들리로 틀어놓고 있었다. 나는 집에 텔레비전을 굳이 연결해놓지 않아서 그 프로그램을 제때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에서 누가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보지 않아도 잘 안다. 알 수밖에 없다. 어딜 가도 그 노래들이 ‘새로운 상품’이 되어 흘러나온다. 훌륭한 머천다이징이다.


슈퍼스타 K가 그랬듯이 <나는 가수다>의 가수들도 정해진 “틀”을 부여받는다. 그렇지 않고서는 “게임”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임은 룰과 참여를 동시에 보장해야 진행할 수 있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룰이 정해져 있는 가운데 표현을 한다는 건 압도적으로 ‘기’가 강조된 기예(技藝)일 수밖에 없다. 룰은 ‘자연스러움’을 용납하지 않는다. 목소리로 차력을 하는 가수들에게 사람들은 ‘점수’를 매긴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에서 아우라의 상실을 이야기했다. 아우라 – 예술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분위기. 심상하지 않은, 예술을 ‘특별한,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드는 시공간의 마법. 우리는 카메라라는 기술에만 그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처음 <나는 가수다>가 시작했을 무렵, 이소라는 <바람이 분다>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카메라는 그녀의 눈물을 클로즈업했다. 나는 그 노래를 좋아한다. 새삼스럽게 듣는 <바람이 분다>는 이러니 저러니해도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동생에게 말하자, 그녀의 대답은 쿨했다. “걘 맨날 울어.”


내가 이소라를 좋아하니, 이소라를 중심으로 얘기해보자. 이소라가 ‘표현’에 압박을 느껴 카메라 밖으로 도망치려고 들자, 카메라는 끈질기게 이소라를 쫓아갔다. 이소라가 날씨도 잊고 집에서 와우를 한다는 걸 이 카메라는 드러내야만 했다. 이소라의 점수와 평가는 ‘이소라의 도망’까지 포함해서 매겨질 수밖에 없다. 이 프로그램의 자막은 언제나 호들갑스럽다. 지켜보는 사람이 무언가를 느끼기도 전에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미리 다 알려준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나오고, 열창을 하는 가수의 주름이 클로즈업되며, 시청하는 사람은 감동을 받기도 전에 감동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감동하기 전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그대로 둔 채 누군가를 떨어뜨린다는 거다. 모두 다 잘해도 모두 다 승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떨어진 사람의 참담한 표정을 다시 카메라가 클로즈업하고, 일등을 한 사람의 열적은 표정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나는 그 카메라 뒤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는 걸 포기했다. 기시감 때문이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아이돌이 아니라 이런 가수들에 관심도 가지고 좋지 않아?” 나는 (지금 생각해보니) 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럴 거면 <음악여행 라라라>를 없애지 말았어야지” 라고.


이 프로그램에 나온 가수들은 “제가 이제 노래할 기회가 별로 없는데, 노래를 하고 싶어서요” 라고 짠 듯이 말했다. 가수라면 노래를 해야 하는데, 노래할 기회를 운운. 마치 지금까지는 노래할 기회가 없었던 것처럼. 아, 없었던 게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음악여행 라라라>도 <문화 한 페이지>도 없어졌으니. MBC가 <음악여행 라라라> 대신 <나는 가수다>를 선택한 이유는 너무 명백하다. <음악여행 라라라>는 재미가 없다는 거다. 사람들이 재밌게 (정확히는 더 많이) 보려면 자극이 있어야 하는데, <음악여행 라라라>의 자극이라고는 미중년 김창완의 소년같은 미소(이런 게 팔릴 리가 없지)와 음악적 자극 뿐이지 않은가.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할 수도 있다. “아이돌이 아니라 이런 가수들”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는 거다. 이들이 아이돌이 아닌가? 소위 ‘진짜 가수’와 ‘아이돌’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설마하니 목소리를 어디까지 높이 끌어올릴 수 있는지는 아니겠지. 노래를 ‘잘’ 한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대중들 앞에서 단지 재롱을 떠는 존재, ‘진정한 예술’과 거리가 있는 존재로 아이돌을 규정한다면 이들이 하고 있는 행동은 재롱이 아니란 말인가. 넘버 원을 부르는 이소라, Run Devil Run을 부르는 윤도현은 ‘무슨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 그 노래를 불렀는가.


한 명 한 명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할 때마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대기실을 비춘다. 앉아 있는 가수들은 끊임없이 “어떡해”를 연발한다. 자막은 끊임없이 그 노래가 참 아름다운 노래라고 강변하지만 앉아 있는 다른 가수들은 그렇게 듣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카메라는 그들의 머릿속에 단 한가지 생각만 들어 있는 것처럼 그려낸다. “나보다 잘하는 거 같아”.


대기실에 앉아 있는 가수들은 지독하게 수동적이다. 이들이 이 곳에 서서 노래를 하는 이유는, 카메라 뒤에서 보기엔 매우 정확한 한 가지 이유 뿐이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이들은 온갖 종류의 실험들을 한다. 옛날 노래를 부르고 편곡을 하고 신기해 보이는 온갖 행동을 카메라 앞에서 다 한다. 그들은 상대방의 노래가 좋으면 좋을수록 고개를 숙이거나 불안한 눈빛을 한다. 아무리 좋아도 그들은 대기실을 박차고 나가서 그 가수 옆에 서서 말할 순 없다. “노래가 참 좋네요, 우리 같이 노래할까요?” 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렇다. 그들은 불안한 눈빛을 한다. 이소라는 MC를 보다가도 박수를 크게 치지 말라고 툴툴거린다. 강요당하는 룰로 그들을 나서게 하는 건 바로 그 불안한 눈빛이다. ‘죽을까봐’ 무서우니까, 그들은 꼼짝없이 죽지 않기 위해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누군가, 그래, 바로 우리들이 그 핏대를 카메라를 통해 편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아무런 걱정없이, ‘쉽게 감동하면서’, ‘누가 떨어질지 기대하면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기시감을 느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내 애인은 군대의 여러 사람들이 이소라가 떨어지길 바란다고 했고, 나 역시 그렇다고 했다. 맥락은 조금 달랐다. 그 사람들은 이소라에게 ‘쇼맨십’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건 필요 없다고, 그런 사람들한테 들려주기 싫다고 이죽거렸다. 그녀의 노래는 쇼맨십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경쟁의 룰 안에서는 그 규칙에 맞는 능력이 필요하다.


옆집 남자가 하루 종일 노래를 한다. 노래를 하는 레퍼토리는 <나는 가수다>가 진행될 때마다 바뀐다. 윤도현이었다가, 임재범이었다가, 김동욱이었다가, 한다. 그는 매우 열심히 남의 목소리를 복사해내려고 하지만, 그는 녹음기도 아니고 카메라도 아니므로 언제나 실패한다. 우리 집 화장실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매우 잘 들린다. 나는 샤워를 하면서 그의 노래를 듣는다. 왜 그가 저토록 열심히 노래를 따라하려고 하는 걸까, 생각하다가, 나는 파스빈더의 영화를 떠올렸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원제는 Angst Essen Seele Auf라고 한다. Angst isst Seele auf라고 써야 맞는 건데, 아랍인 남자는 독일인 연인에게 자기나라 속담을 제대로 번역해 줄 수 없다. 그는 독일인의 법칙에 따라 살 수 없다. 그는 ‘쿠스쿠스’가 먹고 싶다. 이소라의 눈물은 카메라 속에서 번역되지 않는다. “쟨 맨날 울더라”,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카메라는 싸늘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모든 걸 그 시선을 통해서만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이 카메라의 시선이 매 순간 내 삶에서 살아 숨쉬는 걸 느낀다. <나는 가수다>를 보던 보지 않던 상관없이. <나는 가수다>를 아이돌과 비교하던 사람은 쇼 음악중심에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티셔츠를 끌어올리던 레인보우가 경멸스러웠을 수 있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는 <나는 가수다>보다 훨씬 쿨하다. 아주 진지하게 사람들을 경쟁 속에 몰아넣고 농장에서 음악 뽑듯 음악을 뽑는 <나는 가수다>나 <슈퍼스타 K>에 대한 반대항으로 <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는 정립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 대한 반정립을 새로 세운다면?


누구는 노래를 ‘더’ 잘한다고들 한다. 누구는 누구보다 ‘더’ 예쁘고, 누구는 누구보다 춤을 ‘더’ 잘 춘다. 똑딱이 카메라보다 DSLR이 ‘더’ 멋지고, DSLR을 아무나 다 들고다니는 이 획일화 된 세상에 대한 반대항으로 누군가는 로모나 홀가를 들고 다닌다. 그게 ‘더’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처음 예술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날 제일 당혹스럽게 한 건 클래스메이트의 단호한 말이었다. “나는 그 작가 싫어.” 난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 싫어해야만 할 것 같은 맹렬한 강박을 느꼈다. 지금 누군가를 싫어하지 않으면 난 제대로 된 취향을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무엇이 무엇보다 ‘더’ 좋아야 했고, 나는 누구보다 ‘더’ 나아야만 했다.


대중문화는 기시감, 즉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면서 발전한다.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모순을 되풀이 하는 작품들에서 공감을 한다. 그게 바로 너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동료를 밟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낭떠러지 같은 자본주의 사회. 우리들이 자신의 목이 끊어지도록 목소리를 높일 때, 마찬가지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가 있다.



그리고 나는 차분하면서도 극적인 이소라를 듣는다. 내 생각에 그녀는 목소리로 과도하게 장난치지 않고도 감정을 잘 표현해내는 훌륭한 가수다. 룰 밖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건 훨씬 커다란 이야기다. 음악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 해 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음악’이 어떻게 만들어졌던가. 사람들을 위로했던 음악들이, 예를 들자면 아일랜드의 민속음악 Danny Boy가 무엇과 경쟁했던가.


경쟁을 통해 이 나라의 모두는 영어를 잘 하게 되었던가. 경쟁했으므로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던가. 한 가지의 룰을 통과시켜 모두가 그 룰로만 무언가를 잘 하게 되는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일까. 모두가 곡예하듯이 아슬아슬하게 노래하고, 모두가 토익을 990점 맞으며,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고 말을 잘 하는 그런 세상. 경쟁은 필연적으로 일직선을 부른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이 ‘승리’하는 세상에서 조근조근한 목소리는 아름다울 방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경쟁이 세상을 발전시키나?


발전한 그 세상은 정말 ‘발전’한 세상일까? 당신의 세상은 그렇게 편협해도 괜찮은 걸까? 다른 무언가의 일직선상에서 안티테제로만 존재하면서, 스스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그렇게 즐거울 일일까?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의 마지막 장면은, 길을 잃어버린 철거민 은교와 무재가 함께 숲을 걷는 장면이다. 이 마지막 장면이 나는 세상을 발전시킬 거라고 믿는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노래할까요.”


누군가에게 ‘노래할까요’ 라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하면서.


덧글

  • 제르미날 2011/07/05 19:24 # 답글

    저 같은 경우는 나가수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끝판왕'이죠.

    서바이벌 경쟁을 해야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다는 게 씁쓸하긴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인생 속에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하물며 활동가들도 서로 서열 투쟁을 벌입니다.

    운이 매우 좋아서 내일 당장 세상이 뒤집어진다 하더라도,
    경쟁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는 적어도 금세기 내에는 불가능할 겁니다.
    물론, 노력하면 경쟁 문화가 좀 덜해질 수는 있겠죠.
  • nibs17 2011/07/05 19:37 # 답글

    점점 나가수에 대한 피로도가 쌓여간다는 느낌이 저도 확실하게 드네요.
    그냥 수요일 밤 마음편하게 멋진 음악, 좋은 영상을 감상하게 해 주던 라라라가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이제 아름다운 콘서트로 이름을 바꾼 아이콘이 라라라의 뒤를 이을것만 같더군요.
    일요일 밤 12시 40분 편성이라니...

  • 2011/07/05 21: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앤윈 2011/07/05 22:55 #

    8개월 후 제대.
  • deepthroat 2011/07/12 00:29 # 답글

    이소라, 나도 참 좋아하는데 내 기억은 유영석의 FM인기가요에서 금요일 밤마다 나와서 정말 정말 정말 꼬꼬마의 애간장에 녹아내린 초코릿을 바르고 그 위에 포도주를 들이 붓는듯한 목소리로 재즈를 불러줬을때...
    정말 매주 금요일을 그렇게나 기다렸던 이유가 이소라의 몇곡 부르지 않는 그 시간을 위해서였는데...

    나가수는 참 별로야. TV가 없어서 보지도 않지만, 나가수가 시작하면 트위터 타임라인이 죄다 점령되고, 누구나가 음악평론가가 되는 모습에서 가카시대 최고의 프로파간다는 역시 나가수다라는 생각마저 들더라. 투표 결과마저 뒤집는 다이칸미국 최고의 버라이어티랄까.

    하나더, 나가수를 실망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이소라가 노래를 불렀다 해서 유튜브를 습격하여 그 장면을 보는데, 컨씬(...)으로 감탄하는 가수들을 처 넣은걸 보고 뭐 이런걸 본방사수 해야 하나-ㅅ- 라는 생각만 들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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