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7 16:50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세계 - 레폿 세이빙(3) 좌빨인데 모


 나는 레포트를 세이브 하기 위해서 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가…
 그러나 지식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올리겠습니다. 누군가 비슷한 주제를 궁금해하다가 찾아볼 수도 있는 거고. 이 수업은 '여성과 경제'라는 수업이었습니다. 교수님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인 거 같았고, 이걸 쓰기 전에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마리아 미스 - 반다나시바 『에코페미니즘』, 케이트 밀렛 『성의 정치학』, 알리스 슈바르쳐 『아주 작은 차이』 , 시몬 드 보봐르 『제 2의 성』등을 읽기를 권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책들이 있지만 제가 읽은 책들을 위주로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가 더 영향을 많이 받은 책은 교수님이 권하지 않은 린지 저먼 『여성과 마르크스주의』임도 밝혀둡니다. -_-;

 대체로 당위적인 얘기라 별로 볼 건 없어요 사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여성, 성 상품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육체의 상품화와 관련하여
 2 현대 소비사회에서 여성이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억압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라
 3 긍정적인 글로벌리즘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보라의 세 가지 주제로 썼습니다.


 얼마 전 오빠 컴퓨터에 포르노를 모아놓은 폴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남성이 웬만해선 다 보고, 그 과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 사회화되어 있는 미디어이니만큼 충격받을 문제는 아니었다. 자본주의 체제가 억압적인 성적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에 오빠는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였다. 그래도 포르노는 본다. 포르노에 대해서 비판적인 생각이 있는 남성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오빠부터 남자인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포르노그라피로 분류될 수 있는 성적 창작물들을 보지 않는 남성은 적어도 지금까진 발견한 적이 없다. 여성주의에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아서, 포르노를 보는 행위가 죄악인 것처럼 인식하는 친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술만 마시면 내가 ‘야동’을 못 끊어서 안 되는 거라고 자학을 담아 낄낄대며 얘기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는 명제에 동의할 수 없다. 내 친구들과 연인들은 강간범이 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성적 에너지가 충만한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떠나서 성적인 에너지를 표출할만한 창작물은 누구에게라도 필요한 법이다. 다만, 이 사회가 포르노라는 체계를 권장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게 이들의 욕구에 눈을 가린다. 여성은 자연스럽게 그 체계 안에서 지배당하는 존재로 있을 수밖에 없다. 포르노 산업 속에서 여성의 이미지와 권력관계는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단순히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만이 상품은 아니다. 포르노 배우의 몸이 상품으로 팔린다는 것은 그네들의 몸과 성 자체가 상품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포르노 속에서 여성의 몸은 파편화한다. 그 여성은 인간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거대한 가슴으로서, 음부로서만 작품 속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여성의 인격과 삶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성적 에너지를 표출하는 형식이 포르노라는 것은 권력관계의 스토리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과 경쟁하고 떨어뜨려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상품으로 기능을 한다는 걸 의미한다.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것이 대중적 상품성, 즉 속물적이라고 분류될 수 있는 부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이때 이 두 가지의 분류기준은 나타난다. 작품 속에서 인간의 몸은 ‘대상’으로서의 상품, 즉 물건 취급당하고 있는가. 또한, 권력관계의 불균등성이 어떻게 상품화하고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타인을 권력으로 굴복시키기 위한 경쟁 논리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몸에 대한 상품화와 파편화 역시도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다. 그래서, 포르노는 끊임없이 재생산될 것임이 틀림없다.

성매매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성판매 여성은 하나의 인격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인격이 아닌 분절된 성적 대상으로서만 기능을 할 수 있다. 분절된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함에도 성판매 여성은 자신의 인격을 가진 채, 자신의 신체를 통째로 타인에게 대여하는 ‘몸 자체의 상품화’ 상태에 놓여 있다. 성판매 여성은 결코 자신의 신체를 통제할 수 없다. 가학적 행위 앞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없고, 성적 서비스라는 형태 앞에서 신체의 자기 결정권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신체적 손상조차 ‘보상’됨으로써 상품이 되는 것이다. 흔히 성매매가 근절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논거로 제시하는 ‘성매매의 역사’의 측면에서도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고대의 신전에서 여성들이 하나의 의식으로 성매매를 치렀던 것과 여성의 신체 자체가 하나의 상품으로 자결권을 잃어버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이 상품화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그 안에서 동력이 되고 있다. 노동력의 상품화가 인간들에게 자신의 삶을 통제할 가능성을 앗아갔듯이, 성의 상품화는 그 위에 신체의 결정권마저 앗아간다.

낙태와 대리모 문제도 같은 궤를 이루고 있다. 생명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여성의 신체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생명의 존엄성’을 이유로 낙태를 반대하는 경우나, 보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리모의 자궁을 판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 이 여성의 신체 결정권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여성은 이 경우 단지 ‘그릇’일 뿐이다. 새로운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사회의 노동력과 구성원을 재생산하는 과정이 여성의 신체 결정권과는 기계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한다. 실제로 태아를 임신하고 출산을 하는 모든 과정이 여성의 신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모든 경험을 그 여성이 직접 겪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 경우 여성을 단지 그릇으로 인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몸의 상품화가 자본주의 체제 곳곳에서 충분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몸의 상품화가 경제적 토대로서 체제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와 섹슈얼리티가 자본에 의해 억압될 경우, 그것이 낳는 가장 끔찍한 결과는 통제의 불가능성이다. 여성 자신이 자신의 성과 몸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여성이 자신의 삶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것과 연결된다. 자신이 상품이 되었을 때, 체제에 의해 인간은 자기 삶을 잃어버린다. 자기 삶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상품화를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은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한다. 상품화를 통제할 수 없어서 체제의 상품화 자체를 내면화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소비’의 형태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아실현을 할 길을 흔히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자아를 위로하기 위해, 끊임없는 소비를 한다. 제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소외는 결국 소비로 귀착되게 마련이다. 그 소비 자체가 자신을 옭아매는 억압으로 역할을 할지정 그것은 쉽게 멈출 수 있지 않다. 삶에서 겪는 가장 대표적인 ‘소비’와 ‘억압’은 이미지의 상품화일 것이다. 신체 그 자체가 상품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인간은 훌륭한 상품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소녀시대가 길고 늘씬한 다리를 좍 뻗으면서 춤을 추고 있을 때, 내 동생은 이죽거렸다. 그네들의 다리에 주삿바늘이 수백 개는 들어갔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동생은 그들을 부러워했다. 쟤네들은 기획사에서 알아서 튜닝도 해주고 계속 몸매 관리도 해 주고, 얼마나 좋을까. 소녀시대가 상품이 되기 위해서 참고 견뎌야 하는 주삿바늘의 과정 자체가 이미 선망의 대상인 셈이다.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서는 소비하는 것만큼 아름다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많은 사람은 제 몸을 틀에 맞추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 몸의 상품화 자체를 가치로 내면화했다. 몸의 상품화가 진행될수록 그것은 여성들 개인의 자율적인 의지인 것처럼 보인다.

다이어트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여성들이 계속해서 텔레비전을 잠식하고, 여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몸을 상품화하는 데에서 자신감과 기쁨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끊임없이 제 몸을 틀에 맞추고 자학하면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제 많은 여성은 왜 섹시한 이미지를 자신이 가져야 하는지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자본의 지배 아래에 있으면서도 이것을 통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억압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거대한 억압이다.

이 경우 소비에 의한 자아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을 때 거대한 자아상실감을 안게 되기도 한다. 그럴 때조차도 사회 전체가 이미 상품화된 몸의 이미지를 이데올로기로 가지고 있으므로 소비 자체를 멈출 수는 없다. 계속해서 그 자아상실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주삿바늘 수백 개가 들어가야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몸에 자신을 끼워 넣지 못할 경우, 그 여성은 사회에서 도태되게 된다. 무한 경쟁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이들 개인에 대해서 비난할 수는 없다. 나 역시 포르노를 소비한다. 많은 청소녀들이 포르노를 재생산한 야오이물을 소비하면서 성적 에너지를 표출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몸을 동경해야만 한다. 성을 판매하는 여성들 역시도 제 삶을 꾸려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 역시 사회 자체가 강제하는 통제의 불가능성과 소외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성을 구매하는 순간에는 자신에게 통제할 힘이 있다는 잠깐의 착각이 찾아오겠지만, 그 환상은 화대를 내고 나오는 순간 스러진다.


글로벌리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가장 큰 골자는 이 ‘자본주의의 세계화’이다. 조제 보베가 맥도날드의 타일을 뜯어낸 이유는 이 자본주의가 모두의 삶을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빠뜨리기 때문이었다. 자유 무역은 기업들에 이윤을 무한대로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카길은 자유롭게 GMO를 개발해서 카길의 농약밖에 사용할 수 없는 밭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소비자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자유도 가질 수 있다. 기업들은 자유롭게 여성의 몸을 상품화해서 팔아먹는다. 민영화된 의료산업은 응급실을 없애고 입원실을 비싼 가격에 늘릴 자유를 가진다.

이런 세계화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자유는 위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몸을 마음껏 상품화할 수 있는 자유다. 인도의 농민들이 빚을 더는 이길 수 없을 때 목을 매달 자유다. 실제로는 어떠한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세계화는 억압받는 모든 사람에게 삶을 통제할 가능성을 앗아간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강요다. 켄 로치 감독의 <내비게이터>에서 철도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이윤 추구를 할 수 있도록 민영화된 철도 산업 속에서 모든 자유를 상실한다. 자율적으로 지금껏 해 왔던 일들에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한 새로운 규칙이 선다. 그리고 끝내 그들은 목숨까지도 상실하고 만다.

분명히 세계는 가까워졌다. 우리는 휴대전화로 지금 아일랜드에 있는 사람이 몇 시를 살고 있을지 알 수 있고, 몇 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면 찾아갈 수도 있다. 인터넷에서 오바마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사는 블레어 씨와 의견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폭격했을 때, 충격에 빠진 건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이것은 단지 자본의 세계화만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본이 세계화하는 만큼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운동 역시도 세계화한다는 것이다. 시애틀시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한국인으로서 지역적 단위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나 사이의 공통점을 그다지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영화 <내비게이터>의 철도 노동자들의 삶에서 분명한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를 통제하려는 힘이 세계화해서 다가올 때, 우리는 그 힘에 세계화해서 맞서야 할 것이다. 자본의 자유가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자유가 우선하는 세계화. 세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세계화.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세계의 수많은 일하는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프랑스 노동자들이 기계를 멈춘 것처럼, 가자 지구의 폭격에 반대하면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추위에 떨면서 외친 것처럼. 이 사람들이 연대하는 세계화가, 우리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희망을 품어다 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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