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온 나라가 뒤흔들리는 거 같던 감격적 촛불경험 속에서 나는 걍 마음이 편안치만은 않았다. 그 '촛불'에서 만난 이른바 '운동권'에서 오래 있었다던 사람과 성추행 사건에 연루되어서 하여간에 좀 시끄럽고 복잡하고 그랬다.
난 분명히 거부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그 사람이 강제로 날 추행하려고 했다는 점에 대해서(그 상황에도 그 사람은 자기가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해대고 있었다) 그 사람의 조직에 그 사람에 대한 처벌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완전 대쇼크였다.
이 책에선 그 때 내가 겪었던 경험이 단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제대로 보여줬다. 몇 번씩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미 다 치유되었다고 생각하던 일인데도 마음이 찡해서 혼났다.
"술 마시러 간 그 여자는 정숙하다고 할 수 있나요" 따위의 여성을 단죄하려고 하는 논리가 '진보진영'에서 나올 거라고 난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고,
"(내가 있는 조직)에서 (가해자의 조직)을 음해하려고 하는 수작이 아니냐"는 논란 앞에서 또 상처받았고,
"당사자랑 둘이 만나서 해결해라(내가 그 사람을 만나고 싶겠냐고 병시나) 왜 시끄럽게 들쑤셔놓냐"는 무책임하고도 배려없는 발언에 또 상처받았다.
더욱 큰 문제는 그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거다.
어디 비단 성추행 문제 뿐이겠나. 개인적인 게 정치적인 게 아닐까. 물론 정치적인 건 개인적인 거다. 하지만 개인의 단위에서 우리가 저항할 필요가 정말 없을까. 민주노총에선 이랜드 투쟁 때 몇 번씩이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머니같은 이랜드 노동자들"을 강조했다. 어째서 코스콤 투쟁엔 그게 강조되지 않은 걸까. 같은 비정규직 투쟁인데. KTX 투쟁은 비정규직 투쟁의 "꽃"인 걸까. 와이?
오늘 세미나를 하면서 진씨가 그런 말을 했다. "제가 군대 갔을 때 전교조에서 운동했다던 제 선임이 '여성운동은 하위운동이다, 민중해방되면 자연스럽게 다 되는 거니까 그렇게까지 집중할 거 없다'라고 하던데요" 라고.
난 얼었다. -_-
그리고 "그건 존나 위험한 발언인 거 같아여 그 사람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가튼데여"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거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 같다. 방금 내가 받은 문자로 추정해보면.) 제일 화가 나는 건 역시 이거다. '하위운동'. 현상에 대해서 연대라는 이름으로 조금도 저항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 권력자들.
"에이, 그까짓 거."
뭐 물론 겪지 못한 이야기들도 책 속엔 많다. 나중에 겪을 일일지 어떨진 알 수 없지만. (가능하면 이게 언니들의 노력으로 인해 바뀐 세상을 내가 경험하고 있는 거였으면 좋겠다.)
컵 씻는 거 경험해 본 적 없다.
얼마 전에 집회 중에 누군가 "저기, 앞쪽으로 단체 대표자 분 와주세요. 플랜카드 들어야 되거든요." 라고 나이 좀 있는 남자분 빤하게 보면서 얘기하고 갔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혼란에 빠졌다. 대 대표가자 누구지? 우리 대표자가 누구야? 네가 가세요 아니 네가 가세요 네가 가라구요 대표자? 대표자? …결국 못 갔다 헤헤 행진 시작해버리더라 헤헤
거기다가 내가 지금 있는 지회는 여성이 별로 없는데 여성이 많은 지회로 옮겨보지 않겠냐고 저 쪽이 훨씬 배울 것도 많고 잘나간다고 하는 권유까지 들었던 거시다!
우리 지회에서 선전물 쓰는 건 글씨 제일 잘 쓰는 남성이다 ㅠㅠ 여성 이데올로그들도 많다! 이 책을 읽다보면 내가 겪은 경험들은 손나 꿈같음! 퐌타스틱! 환상! …이게 다 지금껏 열심히 싸워온 많은 여성들에게 빚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찌나 감사하고도 ㅠㅠ (하지만 물론 아직 '학생'이라 겪지 못한 게 많을 수도 있다.)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도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역시 뒷부분일 거다. 뛰쳐나와서 운동을 시작한 언니들의 마음을 백분 이해하면서도 "그래서 나오는 게 해법일까" 하는 생각을, 아직 안에 있는 나로서는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광범한 연대를 외치고 있기도 하다.-_- 하지만 옳지 않은 걸 그 안에서 바꾸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 난 좀 더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100인위의 노력은 너무 아름답다. 진짜 감동의 눈물이 좔좔 흘럿슴. 언니들 짱이에여. 그 안에서 이야기를 하게 만들고, 그 개인개인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일깨워주기 위한 노력들.
'문화운동'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연대들에 대한 얘기 역시 많은 고민을 불러온다. 언젠가 이프에서 주최한 토론회에 가서 난 고민끝에 그런 질문을 했다. 노동운동에 왜 우리나라 여성단체들이 결합하지 않나여. 이랜드 대부분의 노동자가 여성인데. 비정규직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인데. 탄압받는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인데.
그래서 난 역시 "안에서 끝까지 싸워나갈 사람들"의 노력을 더 지지하고 싶다.
발전노조에서 가대위 만든 거, 어떤 구호가 나왔을지 생각하면 진짜 빡친다.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고개숙이는 진보운동, 그게 뭐냐 싶다. 그러면서 난 그걸 꿈꾸게 된다.
KTX 언니들을 위한 가대위. 우리 마누라 힘내라, 꼭 이런 게 아니라고 해도(기왕이면 아니라면 더 신나겠지), 같은 집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가대위. 인간이 인간에게 연대하는 그거. 같이 연대하면서 계속해서 저항하고 계속해서 비판해야 하는 그거. 손을 놓지 않되, 날도 벼리는 그거.
뭐 아직까진 덜 절망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절망하고 싶지 않다.
안에서 싸우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그리고 세상을 바꿔나가는 운동의 방식에 공감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은 어느 정도의 절망만큼 더 큰 희망을 준다. 힘내서 싸우고, 또 외치면서 이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어쨌든 난 '진보' 속에서 계속해서 '진보' 하는 여성들을 기대한다.
KTX 투쟁에 결합하는 당신을 환영하되, 그 언니들에게 "꽃"이라고 부르는 당신에겐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길 바라며.
+) 덧. "남성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때문이다" 라는 명제 자체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남성들에 대해 눈을 감는 행태는 당연히 공격받아야만 한다고 본다. 크게 저항한다고 일상적인 거에 저항 안 하는 건 얼마나 비겁하고도 권력적이냔 말이다. 지배자들이랑 다를 게 뭐냐구요 이 자식들아
+) 덧 둘. 방금 전에 작가 이글루를 찾아냈다... 어 어쩌지...







덧글
알바트로스K 2008/11/06 11:35 # 답글
외치는거죠. 오빠 못믿니? ( -ㅛ-) (....)
앤윈 2008/11/06 12:12 #
헐?;
Seth 2008/11/06 14:35 # 답글
손만 잡는다니까 ( -ㅠ-) ...
앤윈 2008/11/07 11:26 #
아니 이 분들이 무슨 얘기에옄ㅋㅋㅋㅋ
StarLArk 2008/11/06 22:21 # 답글
자기 집단도 자정 못하는 놈들이 무슨 나라를 바로 잡는다고...하여간 운동권이건 뭐건 고인 물은 썩기 마련.
앤윈 2008/11/07 11:25 #
그렇지 않도록 계속 싸워야겠죠 ㅡㅜ
해츨링아린 2008/11/08 02:54 # 답글
진이 운동하는구나 'ㅍ' 몰랐네...
앤윈 2008/11/08 10:03 #
ㅇㅇㅇ 플로어토론 시간에 옆에서 "끝나라! 끝나라! 더 나오지 마! 그만해!" 라고 중얼거리는 성실한 활동가심... (어?)
해츨링아린 2008/11/08 13:01 #
훌륭해.
Hendrix 2008/11/19 01:19 # 삭제 답글
"꽃" 이야기 공감합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그런 생각들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더라구요.트랙백 신고합니닷~
앤윈 2008/12/16 04:32 #
:)
바람 2008/12/15 13:09 # 삭제 답글
으아 읽고 있는데 완전 동감해요
앤윈 2008/12/16 04:32 #
동감해주신다니 반갑습니다: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