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로테스크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로테스크 [grotesque] : '괴기한 것, 극도로 부자연한 것, 흉측하고 우스꽝스러운 것'등을 형용하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러브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먼저 생각되는 건 '그로테스크'라는 단어다. 한 마디로 이 소설들은 '흉측하고 괴기한 것'이라는 것이다.
소설집의 제목은 「공포의 보수」이다. 어째서 이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와 연결되어서 공포가 따라붙는 것인가.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는 하나의 신화적 원형으로 많이 이야기된다. 그렇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분류할 때 서사판타지로 분류하지 않는다. 톨킨과 같이 세계와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어디까지나 공포를 기초로 한 다크판타지에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 공포와 어두움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요소는 그로테스크라는 단어에 있다. '괴기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결국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들' 속에서만 발생한다.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멀쩡하게 현실이 존재하는데 그 안에 나타나는 '있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포를 느낀다. 아예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질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공포의 존재가 아니다. 공존이고 또 다른 세계와 삶일 뿐이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온전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크툴루의 세계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다만 희미하게 우리들의 삶 속에 언제든지 있다는 듯이 불쑥불쑥 드러날 뿐이다. 뿌연 안개를 덮어씌운 상황에서 단지 러브크래프트는 그림을 그리듯이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읽는 건 분위기 뿐이고 의혹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 의혹이 있어도 증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 그 자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독자가 이입하는 '정상적인' 주인공은 있는 힘껏 도망가거나 미쳐버리는 거 밖에 방법이 없다. 결국 러브크래프트의 세계 속에 있는 이 '그로테스크'들은 우리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가 만들어 낸 기괴함은 '공포'로 기능한다.
광기와 현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탄탄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자기 자신의 감각에도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상식적이고 회의적인, 말하자면 상당히 과학자적인 일면을 띤다. 그것은 한 주인공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이성적인 면모들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소설에는 실제 지명들이 등장한다. 그 '괴기'를 찾아가는 여정조차도 굉장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경우(『인스마우스의 그림자』)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의문을 만들어낸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는 계속해서 개운하지 못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선명한 현실과 선명하지 못한 환상이 계속해서 소설 안에서 대치하는 것이다. 선명한 현실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선명하지 못한 환상들은 대치를 통해 확연하게 미지의 존재라는 정체를 획득하게 된다.
공포라는 것은 결국 알 수 없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어떠한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을 때 역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기는 하다. 어디까지나 "그것이 나를 해할 것이다"는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다. 하지만 어떠한 존재가 불분명할 때 "그것이 나를 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의 공포는 알고 있을 때의 공포 따위에는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전자를 스릴러라고 부르고 후자를 호러라고 부른다. 스릴러는 결국 서스펜스다. 공포감을 제공한다기보다는 공포감을 느끼는 주인공이 상황에 빠져들어가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다. 하지만 호러는 다르다. '공포감' 그 자체를 제공해내는 것이 호러다.
「공포의 보수」에는 모두 네 편의 소설이 있다. 네 편의 소설은 서서히 독자를 세상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끌어내는데 효과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인스마우스의 그림자』와 『벽 속의 쥐』에서 아직까지 세상 속에 있어야 했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독자의 분신'으로서 주인공들은 미쳐버린다. 도저히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가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조금 더 그 세계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어둠 속의 속삭임』에서 미치는 대신에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결국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에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 존재를 '믿게 된다'. 또한 그것에 대해 두려워하며, 스스로의 삶을 예감한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크툴루를 주축으로 한 러브크래프트의 세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가 서서히 세계 안으로 편입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소설의 '그로테스크성'을 생각해보았을 때,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어떻게든지 세계 속에서 버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이 그 세계를 완전히 선택했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의 존재를 인정했을 때, 완전히 아웃사이더적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의 주인공은 심지어 너무나 많이 알아버린 자기자신의 죽음까지도 떠올리고 있지 않은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현실과 환상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기댈 수 있는 바도 결국 환상(광기)와 현실의 사이다. 위에서 말한 역설적인 상황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확실한 내재적 요소다.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주인공들이 미지의 세계와 맞닥뜨렸을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치는 것뿐인 셈이다. 『인스마우스의 그림자』에서는 그런 광기와 현실의 경계가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자기 자신이 이미 그 '미지의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사실 앞에서 주인공은 신경장애에 걸려서 그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못하는 상황이 된다. 크툴루 푸타군을 외치는 장면에서는 마치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짐작할 수 있다.
『벽 속의 쥐』에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려고 했다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바람에 결국 미친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이 나온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는 방법(『어둠 속의 속삭임』) 뿐이지만, 거기에도 결국 한계가 있다. 그 속삭임은 결국 우리의 삶에서 배제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 영향을 끼치고야 마는 것이다.
바다 생물 그리고 외계 생물
「공포의 보수」가 보여주는 기묘한 점은 이 그로테스크를 상징하는 생명체들이 하나같이 바다생물의 외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다가 아니라고 해도 물속에 있는 생물이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인스마우스의 그림자』에서는 물고기와 양서류를 반쯤씩 합친 생물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개처럼 네 다리로 뛰기는 하지만. 또한 계속해서 지독한 비린내에 대해서 언급한다. 양서류와 도마뱀에 근접한 얼굴을 한 인스마우스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심지어는 명확한 형상이 나타나지 않고 다만 감각들(냄새와 색깔)로만 증명되는 『어둠 속의 속삭임』에서조차 초록색 피와 지독한 악취는 바다의 비린내를 연상하게 만드는 묘사로 쓰여진다. 또한 가장 많이 쓰이는 것 중에 하나가 젤리같은 형체다. 형태가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는 "젤리"라는 묘사는 보통 물기를 머금은 생물체에게 사용된다. 일반적인 포유류에게 젤리라는 묘사는 불가능하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가장 1차적인 생물체, 즉 물속에 사는 생물체들에 대한 묘사를 할 때 가능한 묘사다. 대표적인 젤리같은 생물체로는 우리가 흔히 아는 해파리가 있겠다.
가장 그 형태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다. 초록색의 반투명한 젤리같은 형체(완전히 해파리를 연상시키는)를 하고 바다를 헤치면서 배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크툴루의 형상은 말 그대로 '기괴하기' 그지없다. 또한 대부분의 소설에서 미지의 세계로 다가서는 문턱 역할을 하는 고대의 유적들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물건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직접적으로 물고기의 머리를 단 기괴한 조각일 때도 있고, 조개껍데기 같은 것일 때도 있다. 그러한 조개껍데기는 안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소용돌이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바다 생물'인 소용돌이치는 조개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먼저 이토 준지라는 일본의 만화가가 그린 「소용돌이」라는 작품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소용돌이」는 상당히 뛰어난 방식으로 인간의 공포를 정확하게 집어낸다. 소용돌이라는 소재는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양부터가 어디선가 '기괴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이 소용돌이는 결국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암모나이트에서 이 소용돌이 모양을 찾아볼 수 있다. 암모나이트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가장 '원시적인' 부분들에 이 소용돌이 모양은 존재한다. 결국 어떠한 태초의 상징으로서 소용돌이 모양은 인간에게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태초의 것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미지의 것이다. 우리는 태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과 동시에 태초의 것은 우리 속에도 존재한다. 미지의 것을 끌어안고 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미지의 것이 날 해칠지도 모른다는 것과 비슷하면서 다르게 공포감은 극대화 된다. 우리가 알지 못할 때부터 우리를 구성해 왔고, 이 세상을 만들어 왔던 존재는 자연스럽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물속'에서 우리의 육체가 왔다고 한다면(왔다고 한다면, 이라고 굳이 전제를 달지 않아도 이 세계는 이미 엄청나게 많은 빚을 물에 지고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을 존재하게 만드는 건 미지의 세계이며 미개하다고 생각되는 바다생물들에게 있다. 바다는 또한 미지의 영역이다. 바다생물들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의 통제력 밖에 있는 생물들인 셈이다. 더불어서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 생물들이기도 하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크툴루를 비롯한 이 소설에 나오는 이세계(異世界)의 종족들은 하나같이 바다생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생물들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들은 무기력 해 질 수밖에 없다. 바다생물을 대상으로는 "싸울 수" 없다. 바다생물을 대상으로 싸움을 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며,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바다와 물에서 왔기 때문이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나오는 이 생물체들은 단순히 '바다생물'만은 아니다. 동시에 '외계생물'이다. 『어둠 속의 속삭임』같은 경우에는 그런 점에서 SF의 시초격 위치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둠 속의 속삭임』에서는 지독한 냄새와 초록색 피를 가진 에일리언의 원형도 보여준다. 또한 '인디언의 신화'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공포의 보수」가 보여주는 공포들은 '미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그 미지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우리의 삶이 가지는 원형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다. 인디언의 신화도 그 중 하나다. 인디언은 문명세계의 밖에 있다. 문명은 '만들어 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로서 인디언은 존재한다. 결국 문명세계의 인간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인간은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조상이자 뿌리인데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바다생물에게 가지는 두려움과 마찬가지의 두려움이다.
원시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 원시에 대한 두려움을 러브크래프트는 한 단계 더 진척시킨다. 이 생물들을 지구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이 아닌 더 먼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둠 속의 속삭임』과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에서 이 존재들의 불투명함은 굉장히 강해진다. 『크툴루가 부르는 소리』같은 경우에 일종의 신神임에도 불구하고 크툴루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툴루의 존재는 불투명하다. 이 세계에서 태어나지 않은 존재라는 점만이 불투명한 가운데 의혹으로 드러날 뿐이다.
어째서 외계 생물체로 설정되는가. 결국 지구상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인간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서양문학일 경우에는 기독교의 영향권 안에서 그런 생각은 더욱 강하다. 하지만 크툴루는 외계 생물체이다. 외계 생물체이며 거대하고, 거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알 수 없다. 전혀 짐작할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그로테스크'한 존재 앞에서 인간의 공포감은 극대화 될 수밖에 없다.
뿌리의 공포감
앞에서 나는 원시와 뿌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통제권 안에 넣는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삶 속에서 인간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것들과 조우한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시'다. 원시(原始)는 말 자체에서도 보이듯이 '근원'적인 존재다. 그 근원 속에서 나온 것이 결국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자기 자신 이전에 존재했던 것, 그러므로 결국 자기 자신도 그 카테고리 안에, 그 뿌리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그렇기 때문에 원시는 공포로서 기능한다. 인류학자들은 원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국 원시가 가지는 공포성 때문이다. 원시는 뿌리이지만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다. 더불어서 문명이 제거해 낸 어둠을 모두 내재하고 있다.
「공포의 보수」속에서 드러나는 원시는 태초격인 바다생물의 모습을 하고, 죽음과 삶을 넘나든다. 『인스마우스의 그림자』에서 바다생물의 모습을 한 기괴한 외계생물들은 인간들과 섹스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씨를 뿌린다. 이 생물들의 사이에서는 인간과 바다생물의 중간형태의 인간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들은 죽음을 만났을 때 그들을 도로 살려낸다. 말하자면 좀비의 원형이 여기에도 있는 셈이다. 일종의 강신술이다. 섹스와 죽음은 문명세계가 가장 외면해왔던 가장 본능적인 요소들이다. 원시는 그것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 소위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는 인간들이 상륙했을 때, 그들은 그 '공포적 요소'를 감추려고 하면서도 매혹당했다.
인간의 원형이자 생명의 원형, 세상의 원형인 크툴루는 '고대부터 있었던 신'이기도 하지만 '살육을 예고하는 신'이기도 하다. 잠깐 솟아오르는 크툴루의 모습에도 수많은 선원들은 공포에 떨며 실성한다. 죽음과 광기 역시 굉장히 근접해 있는 '문명세계가 외면해 온 뒷면'이다.
결국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어왔던 현실의 뒷면에는 전혀 견고하지 못한 본능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 웅크리고 있는 본능들을 이 환상적 요소들을 통해서 러브크래프트는 확실하게 집어낸다. 그 공포 앞에서는 결코 그 본능들에 대한 흥미를 외면할 수는 없다. 더불어서 이것들은 '원시'다. '뿌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결국 이 성욕, 타나토스, 광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껏 외면해 온 견고한 현실세계 속에 이런 아이러니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거 자체로 기괴한 일이다. 인정한다고 해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기괴함'은 '공포'가 된다. 소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알지 못하는 것, 끝까지 외면당하는 것이 가장 밑바닥에 있는 뿌리라는 점은 지독히도 공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 위에서 그것을 외면하면서 '정상으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삶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러브크래프트가 만들어 낸 이 공포스럽고 기괴한 세계, 우리의 삶은 언제라도 끝날 수 있다는 타나토스를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세계에 두려움과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오히려 정상이다.
공포를 즐기게 만드는 건 결국 환상이다. 깨어있을 때 우리는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꿈속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무시무시한 환상을 볼 수 있다. 그 환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물고기와 양서류를 반쯤 합친 젤리모양의 생명체가 인간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광경 같은 것 말이다. 이 광경이 두렵다고 느끼는 건 결국 꿈에서 깬 다음이다. 꿈속에서는 단지 꿈일 뿐이다. 하지만 삶에 꿈이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악취 가득한 악몽에 매혹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짤방은 초간지 위대하신 크툴루 본좌. 다리 한쪽만 봐도 다 막 무서워서 죽어버리고 그런다능. 나 방금 꽁치랑 굴 먹고 왔다능. 후훗.










덧글
kkkclan 2008/11/14 13:25 # 답글
아 러브크래프트 많이 들어는 봤으나 아직 못봤다는...
앤윈 2008/11/18 02:11 #
재밌어요 +_+
StarLArk 2009/01/12 00:44 # 답글
크툴루신화의 선득함은 인본 중심의 유일신이 아니라는 관점에서동양인과 서양인이 느끼는 공포에 차이가 있다던 평도 있더군요.
앤윈 2009/01/12 01:49 #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과연. 문화권의 차이는 그런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