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때문에 내러 못 간다고 지헌이한테 부탁해놓고 퍼 잤다. 썅.
지각한 마당에 레폿 세이빙(2)
왜 매일 지각하지 대체 나는... 아, 잠은 진짜 잘 잤는데... 허흑...
이걸 다 읽을 사람이 결코 없을 거라는 확신 + 그다지 자신감도 없음. 이틀만에 썼다규요 죄송합니다 교수님 정말 세이빙이 목적인 세이빙을 위한 글... 구론데 구로나 고양이기지개라면 인내심을 가지고 읽을까. 결국 나 백가흠 뺐어. 너무 토나와서, 진짜 못 쓰겠어. 으헣헣헣
문장도 개판이야! 나중에 수정해야지... (레포트 내고 나서 블로그에 올리려고 수정하다니 왓 더)
Ⅰ 2000년대 문학과 판타지
백낙청은 2000년대의 문학을 '각성한 노동자의 눈'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 2000년대는 거의 막을 내려가고 있다. 그 사이에 한국문학은 다양한 변화를 거쳤다.
나는 그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박민규, 이기호, 천명관 등의 젊은 작가들이 등장시킨 판타지에 주목한다. 2000년대에 처음 문학에 나타난 이 젊은 작가들은 백낙청이 예견한 '각성한 노동자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상당히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1990년대의 리얼리즘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그러나 여전히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매개로서 존재한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이야기들을 비유적으로 풀어낸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들은 일반적인 환상성의 범주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을 빌려서 표현한다는 것은 다양한 층위의 해석을 낳는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환상은 대변하며, 말해야 할 것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이들은 '각성한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훌륭하게 환상성을 이용한다.
이 환상성에는 환상성 자체가 내재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은유가 존재한다. 많은 경우 이들은 환상성을 빌려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이면들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들이 '각성한 노동자의 눈'을 가지고 있다면, 이들이 바라보는 세계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한 환상으로 그려지는 것에 있어 반영이론과 생산이론의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이 역사와 현실을 반영하는 상부구조의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역사와 현실이 그 안에 변화의 동력을 내재한 부분을 환상성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폭발시킬 수 있다. 더불어서 문학이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것 역시도 사회적 대안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2000년대의 문학에서 환상성이라는 표현방식은 이전의 문학들과는 다르게 장르문학적 요소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특히 '시치미를 떼는 논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박민규는 서브 컬쳐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본격 SF 작가 듀나의 등장 역시도 90년대에 이은 서브 컬쳐의 본격적인 대두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서브 컬쳐의 큰 특징은 독자에게 대중성에 기반을 둔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대문학 작가들이 장르 문학들에서 나타나는 대중적 카타르시스를 완전히 내재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런 것들이 보여주는 양상을 차용 및 패러디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와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대중성과의 화해로 읽히기도 한다.
2000년대 문학의 환상적 측면들을 나는 네 가지 구분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박민규를 중심으로 장르문학적인 방법을 빌려 비판적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판타지의 서술 방법, 이기호의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과 천명관의 『고래』를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와 민족주의 담론, 그것이 판타지로 해석되는 방법, 백가흠과 편혜영의 도시 괴담적 판타지가 현실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는 대중문학과 거리를 두는 장르문학들이 현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전반적으로 이 소설들이 내재하고 있는 장르문학적인 요소들 ― 서브 컬쳐로서의 기능들에 대해서도 다루겠다.
또한 나는 문학이 토대로서의 현실을 드러내는 상부구조라는 개념에 입각해서 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반영이론과 생산이론의 측면에서 이 소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소설들이 단지 환상이 아니라 환상으로서 비유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1. 박민규 ― 비현실을 통해 현실 뒤집어보기
박민규의 등장은 2000년대 문단에서 지진과 비슷한 일이었다. 현실과 판타지, 대중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가 박민규의 소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민규는 적극적으로 판타지를 차용하는 작가면서, 판타지를 현실과 첨예하게 결합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데뷔작인 『지구영웅전설』에서부터 얼마 전 이상문학상 가작을 수상한 『龍龍龍龍』에 이르기까지 그 경향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박민규의 『지구영웅전설』은 2004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환상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소설에서 판타지는 ‘만화’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DC코믹스, 마블코믹스의 주인공들이 활약한다.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의 주인공들인 슈퍼맨, 배트맨, 로빈 등은 절대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만화에서의 그들과 마찬가지다.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는 미국의 만화다. 미국 만화로서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성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들은 세계를 구하는 미국식 영웅의 이야기다. 전 세계로 그 가치를 가지고 수출된다.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미국의 가장 자본주의적인 상품 중 하나다.
이 소설은 판타지 내면에 있는 변증법적 특성들을 끄집어낸다. 이 캐릭터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모순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자본주의 체제, ‘자유’에 대해 말하는 시장중심 체제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수행한다. 주인공인 바나나맨은 이 체제 안에 익숙해지려고, 체제 속에 편입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돈이 많은 배트맨이 돈이 없는 로빈을 마운틴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박민규가 보여주는 세계는 완전한 판타지의 세계다. 직접적으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박민규는 만화적으로 세계를 뒤집음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 비유의 높이만큼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다. 영웅인 그들의 비영웅적인 행동은 그만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실제의 세계보다 작기 때문에 명확하게 드러나는 영웅들 사이의 세력균형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배트맨과 로빈의 ‘마운틴’은 비유로서 말하기의 적절한 예다. 여기서 마운틴이라 함은 남성에 대한 남성의 성폭력이다. 남성과 여성이 아닌 남성과 남성으로서 이 영웅들을 세우면서 일반적인 성폭력에 대한 시선을 뒤집는다. 당사자가 여성이었을 경우, 단순히 익숙한 성적 억압으로 보였을 상황은 비유적인 억압으로 재해석 될 여지를 만든다.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억압이 이 소설 속에서는 이러한 비유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박민규의 단편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서 이 비유적 성폭력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 행위 자체가 비유하는 바와 함께 그 행위 자체도 판타지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바나나맨과 같은 소외된 자로서 ‘너구리’가 있다. 누구나 너구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언제 너구리가 될 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너구리는 더욱 포괄적인 비판이다. 주인공은 록그룹 <샘즈 선>을 잊을 수밖에 없고, 살아남기 위해서 일곱 명의 경쟁자를 짓밟을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너구리들은 그 생존경쟁에서 염증을 느끼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을 끝내 놓지 못해서 인간으로서 생존할 수 없게 된 인간들이다. 판타지가 현실에 기능하는 효과적 방법 중에 하나는 우화다. 우화는 시대 자체에 대해 새롭게 통찰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그러면서 시대 자체를 뛰어넘을 수 있기도 하다.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고찰을 하기 때문에 인간일 수 없다, 그래서 너구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매우 우화적인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인간들의 세계는 여전히 ‘마운틴’의 세계다.
“‘마운틴’은 일종의 통치행위야. 원래는 침팬지들의 무리에서 우두머리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을 일컫는 말이지. 수컷암컷을 가리지 않고 엉덩이를 내밀게 한다음 뒤에서 섹스의 동작을 취하는 거야.”
이것은 거부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참고 견뎌야 하는 모멸감이다. 그것을 끝내 견디지 못한 너구리들은 이 세계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이 주인공을 구하는 것은 너구리다. 박민규에게 이 구원은 역시 판타지적인 비유로 나타난다. 목욕탕에서 성폭력을 당했지만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그것 역시 감내해야 하는 주인공에게 ‘인간다움’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너구리는 ‘주인공의 등 전역에 시원스레 비누칠을 먹인’다. 결국 이 비인간적 사회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건 너구리의 위로이자, 너구리의 생존이라는 게 도시에 있을 수 없는 ‘너구리’를 통해서 드러난다.
너구리와 같은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진정한 ‘인간’들은 최근작 『龍龍龍龍』에서도 나타난다. 이 소설은 영웅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지구영웅전설』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龍龍龍龍』의 사룡은 인간의 범위를 오래 전에 뛰어넘은 영웅들이다. 『지구영웅전설』의 영웅들 역시도 이 사룡들과 마찬가지다. 그들은 하나같이 영웅이며, 신화적 존재들이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대중문화의 속물적 특성을 내재한 채 팔리는 존재다. 사룡 역시도 가장 대중적인 장르 중 하나인 무협지에서나 등장할 캐릭터들이다. 가장 대중문화적인 특성을 가진 이들은 그래서 가장 대중문화에서 먼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잘 팔리는 것들이 가장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특성을 내재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미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다. 슈퍼맨은 돈 때문에 사람을 구해선 안 되고, 무협지의 영웅들은 조폭들을 이끌면서 힘자랑을 하고 다닐 순 없다. 대중들은 그들의 가장 비대중적인 측면 때문에 그들을 사랑한다. 이 아이러니가 박민규의 소설 속에서는 판타지 그 자체를 차용하면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한다.
『龍龍龍龍』은 『지구영웅전설』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통찰을 보여준다. 지구영웅전설에서 영웅들이 영웅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것은, 실제로 그들이 영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체제의 일부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龍龍龍龍』의 사룡은 여전히 영웅들이다. 다만 이 세계 안에서 그들은 영웅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다.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고 영웅으로서의 품성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커다란 세계는 자본주의 체제의 속물적 성질 앞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들은 여전히 영웅이지만, 오히려 영웅이 아닌 『지구영웅전설』의 영웅들보다도 영웅으로서 대접받을 수 없다. DC코믹스와 마블코믹스를 대중문화의 상징으로 가져다 놓았다면, 『龍龍龍龍』에서는 끊임없이 소녀시대의 노래가 인용된다. 소녀시대의 노래는 DC코믹스와 똑같은 세계를 보여준다. 가장 본질적인 인간다움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지만, 그들이 팔리는 상황은 전혀 인간다울 수 없다는 것을 노래 가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박민규는 현실을 판타지로 뒤집으면서 비판한다. 그의 판타지를 통한 현실은 분명히 매우 끔찍한 속내를 까뒤집는다. 그러나 박민규의 소설로서의 대안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지구영웅전설』에서 ‘제 3세계 민족주의’와 싸우기 위해 나가는 체제의 대변자 슈퍼맨을 주인공 바나나맨은 따라 달리는 것 외에 어떤 것도 하지 못한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주인공들은 쫓기지 않고 서로 물어뜯지 않는 삶을 위해서 팬클럽을 결성해서 야구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체제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될 수 없다. 그러나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서 너구리는 서로를 긍정하며 계속 존재한다. 우화적 존재가 결국 한 인간에게 구원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이 대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龍龍龍龍』에서는 이 용들은 끝내 이 세상을 떠나서 새로운 세계를 향한다. 이 길을 따라가는 것은 운동권 출신이었던 이장록이다. 그는 함께 신선의 세계로 떠나면서 닭울음소리를 듣는다. 닭울음소리는 새벽을 여는 소리다. 가장 속물적인 사회 그 안에 오히려 가장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나서 서술되는 닭울음소리는 사회 그 안에 사회의 새벽을 열어갈 에너지가 있다는 걸 내재하기도 한다.
박민규의 판타지는 현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현실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다는 희망도 보여주고 있다.
2. 이기호, 천명관 ― 근현대사를 신화로 읽기
천명관의 『고래』는 중남미의 문학을 떠올리게 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의 논법이 숨어있다. 천명관의 『고래』는 박민규의 소설이 그러듯이 가볍게 눙치고 넘어가지 않는다. 그 대신 자연스러운 신화적 장치들이 소설 전반에 녹아들어있다. 대중문화와 신화는 완전히 다른 층위에 있다. 천명관의 판타지는 신화의 영역에서 드러난다.
금복의 삶을 처음부터 지배하는 것은 거대한 고래다. 고래라는 동물의 크기 자체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신화적인 크기로 그려진다. 그런가하면 춘희에게는 코끼리가 있다. 고래와 코끼리로 상징되는 금복과 그의 딸 춘희의 거대서사적인 이야기들은 신화적인 인간 본연의 존재론적 의미로 소우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 본고에서는 『고래』가 가지는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부분보다는 신화적 판타지가 근현대사의 팩트와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천명관의 『고래』는 이 소설이 인간사를 다루고 있으며 그 인간사는 인간 일반의 이야기로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계속해서 환기시킨다.
“그것은 ~의 법칙이었다” 라는 하나의 문장을 끊임없이 변주함으로써 이 이야기를 단순히 금복과 춘희가 아닌 인간 전반의 이야기로 계속해서 확장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삶 전체가 어떠한 법칙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 거라면, 금복과 춘희의 삶 역시도 그 문장으로서 하나의 역사적 틀 안에 위치지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공시적 보편성과 통시적 보편성을 동시에 아우르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결코 공시적으로도 통시적으로도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이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이 역시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고? 그냥 그랬다.
이 소설에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비밀스러워서가 아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무언가를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존재한다. 걱정의 힘과 금복의 매혹적인 향기, 칼자국의 카리스마는 모두 그런 맥락에서밖에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다는 것은 이미 인간이 짐작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화의 영역이다. 걱정의 퇴화나 금복의 동성애가 사람들의 입속에서는 전설로 연결될 때가 되어서야 신화는 인간세계에 자리 잡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신화적인 인물은 춘희다. 전쟁 역시도 인간사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다. 그 전쟁통에 임신한 춘희는 신라시대의 비형이 그랬듯이 ‘죽은 사람의 아이’로 묘사된다. 그와 동시에 죽은 사람의 기도 꺾어버릴 수 있는 인물이다. 춘희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없고, 인간의 세계에 어울릴 수 없다. 그것은 속물적인 인간의 세계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신성이다. 범인(凡人)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태고의 순수다. 춘희는 여성의 몸이다. 여성의 몸속에 전설이나 민담 속의 동자장사가 깃들어있다.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동자장사는 마을이나 세계를 구원하는 상징이다.
춘희 이전의 신성, 금복은 박정희라는 속물적 세계 앞에서 파괴당한다. ‘장군의 시대’로 표현되는 박정희의 시대는 신화를 내재한 사람들에게는 훨씬 커다란 고통이다. 장군의 시대 역시 스케일이 크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장군의 시대가 보여주는 스케일은 결코 태고의 신비와 순수가 깃들어있지는 않다. 이것 역시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경이롭기보다는 참혹하고 끔찍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에 가깝다. 교도소장의 변태적인 취미나 춘희가 고문당하는 장면이 그러하듯이.
소설은 춘희라는 신화적 캐릭터를 통해서, 지나간 역사가 내재한 비극을 반신화로 묘사한다. 평범한 인간이 신화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을 완전히 무시하는 속물적 세계, 그래서 더욱 비극적인 세계로 그 역사에 정체성을 부여한다. 춘희는 아이를 가지지만 그 아이를 끝내 살려내지 못한다. 반신화적 역사 속에서 신화는 재생산 될 수 없다. 그리스에서 말하는 황금의 시대가 지나가는 것처럼, 춘희의 신화적 시대는 지나가고 말았다. 신화를 잃어버린 인간들 앞에서 반신화적 역사의 비극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신화는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며, 더 이상 인간의 영역으로 소화될 수 없다. 고래가 바다에서 숨을 쉬는 대신에 어부에게 잡혀 올라오고, 코끼리가 춘희에게 속삭이는 대신에 박제가 되어서 햇볕에 말라가는 세상이다. 다만 작가는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그 신성에 대해 분명하게 드러내는 춘희의 벽돌 만들기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춘희에게 선사시대의 화법, 그림을 남겨두었다. 신성은 그 흔적으로만 이제 겨우 존재할 수 있다. 속물적 자본주의 체제 속에 대극장이라는 형태로 소화되면서.
이기호의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역시 ‘순수’에 대한 신화적 해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황순녀는 춘희와 같은 궤에서 해석될 수 있다. 춘희에게 신성을 지키도록 하는 순수 그 자체의 기반이 벽돌 굽는 일이라면, 황순녀에게는 감자를 키우는 일이다. 순녀에게 감자를 키우는 일은 그 자체로 진리에 가깝다. 순녀는 감자를 키우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순녀의 이 순수함이 신화적 맥락으로 읽히도록 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화적이지 못한, 속물적인 세계가 순녀와 대치하게 때문이다.
순녀는 자신의 신화성을 간직한 채, 인간과 고립되어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 순녀의 신화성은 순녀를 고립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순녀는 결코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신성을 버리지 않는다. 순녀 역시도 금복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 아이를 임신한다. 금복이 임신한 것이 죽은 자의 아이였다면, 순녀가 임신한 것은 검은 소의 아이다.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는 중요치 않다. 우석은 순녀에게 분명히 검은 소의 아들이며, 소로 인해 임신하는 것은 순녀에게 당면한 현실이다.
“아가야, 걱정할 것 하나 없단다. 엄마가 심은 감자 줄기가 땅 밑으로 쭉쭉 뻗어나갈 거야. 국가란 놈이 암만 땅 위에서 설친다고 해도 땅 밑은 여전히 우리 감자밭이란다…….”
순녀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는 감자밭이다. 순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전한 정의를 구현하려고 시도한다. 농사를 지어서 감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생명의 순회다. 순녀는 씨감자들이 들어있는 토방을 ‘에미들의 방’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 생명을 낳는 감자밭은 결국 국가라는 이름으로 총과 사격장, 군대로 상징되는 세계에 잠식되고 만다.
이 ‘현실의’ 세계는 명확하다. 누렁이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람들은 단지 ‘몇 근이나 나가는데?’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우석이 검은 소의 아들이라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래서 순녀가 우석에게 하는 행동은 아동학대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그들에게는 신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존재라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순녀는 끝내 땅과 감자, 순녀가 가지고 있는 신화의 고리를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순녀의 순수, 말할 수 없는 경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먼 곳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들려오는 순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 한 편에서 무언가가 뭉클거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부슬거리는 빗소리에 더해져 낮고 길게 울려퍼지자, 그때부턴 도통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국 이 군인들은 순녀와 우석에게 ‘홀린다’.
춘희가 비형을 떠올리게 한다면, 우석은 아스테리온 ― 미노타우르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 신화적 인물들은 탄압받을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춘희는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신화 그 자체를 환기시킬 벽돌의 그림을 구워낸다. 시멘트에 가려서 보이지 않겠지만 순녀는 땅 위에서 아무리 세계가 설칠지언정 죽지 않을 신화적 세계를 땅 밑으로 숨어들어가 만들어낸다. 순녀에게도 마찬가지로 역사는 반신화적이다. 계속해서 인간의 신화적 순수성을 깎아내려가는 과정이다. 온전한 형태로 신화적 순수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결코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신화는 태고의 기억이다. 그것은 원초적으로 사라져선 안 될 단 하나의 순수기 때문이다.
신화적이고 아름답기보다는 비극적이고 속물적인 역사 속에서 다치고 시드는 신화들은 결코 세간의 영웅적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것들은 계속해서 내쳐진다. 결국 그 신화는 가장 힘없는 자들에게 가장 이해받지 못할 방식으로 깃든다. 그런 방식으로 이 신화는 자신을 역사 속에서 더욱 찬란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제발 상상 좀 하고 살아라’고 마지막에 일갈한다. 그러한 신화적 상상력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은 시멘트 같은 순수의 상실이다. 이 신화들이 찬란하게 드러날수록 순수가 사라진 세계는 끔찍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당연하게 인지하고 살아왔던 역사의 비극에 이 신화들은 슬픔의 방식으로 메스를 들이댄다. 이 소설들의 판타지는 경이롭고 성스러운 것에 기초하고 있다. 이 판타지는 반명제다. 반명제는 명제가 없이 기능하지 않는다. 명제로서 우리 눈앞에 당연하게 드러나 있는 것은 신성을 상실한 세계다. 신화는 분명히 판타지지만 역사적 판타지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을 응축시키고 비유한 최초의 허구적 세계다. 그래서 인간은 신화 앞에서 경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소설들은 그러한 경이감을 상실한 세계에 주목한다. 역사적 비극을 신성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룸으로써, 역사라고 인지되는 폭력적 세계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3. 편혜영 ― 끔찍한 도시괴담
편혜영의 소설들은 시체와 죽음을 중심으로 풀려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완결성을 가지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죽음을 해결하는 스릴러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 세계에 남아서 음울하고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괴담이다. 단순히 무엇을 잘못한 자들이 처벌받거나,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해서 처벌받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처벌받는 이유는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들의 현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편혜영에게 있어서 현실의 삶은 두려운 죽음의 공간이다. 소설은 대체로 죽음을 알리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체가 발견되거나 죽음의 냄새를 맡는 장면들이다. 환상, 그 중에서도 특히 고딕 소설들에서 드러나는 환상성이 편혜영의 소설에는 첨예하게 드러난다.
죽음은 가장 환상적인 모티브다. 결코 삶에서 말할 수 없고, 다뤄서는 안 될 금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 혹은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이성적 영역 밖에서 환상적 영역으로 드러난다고 문학적 환상에 대해 정의했을 때, 편혜영의 소설은 가장 환상 그 자체의 정의에 충실한 논법을 보여준다. 환상을 경이와 기괴로 분류했을 때, 이 환상은 순수한 기괴와 환상적 기괴의 틈을 넘나든다.
그래서 그것은 ‘괴담’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괴담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장 은밀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즐기게 마련이다. 사람들에게 인식되지 않아야 할 공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편혜영은 그 인식되지 않아야 할 공포를 단순히 공포의 영역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세계의 수면 위로 올려 보낸다. 괴담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금기를 깨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시괴담들은 단순한 도시괴담의 공포보다 훨씬 확장된 공포를 가진다.
「아오이가든」에서 주인공은 누이의 뱃속에서 개구리로 화한다. 「아오이가든」은 격리된 공간이다. 그것은 전염병 때문이다. 전염병은 가장 익숙한 괴담의 레퍼토리 중 하나다. 또한 개구리 역시 전염병의 상징물로 익숙하다. 성경과 애굽의 신화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메뚜기, 파리 등과 함께 익숙한 전염병의 상징물이다. 전염병 때문에 격리된 곳에서 움직일 수 없는 주인공이 전염병 그 자체로 화한다는 것은 이제 그 스스로 ‘전염병’을 옮길 수 있는 숙주가 됨을 의미한다. 그것을 만들어 낸 것은 그들을 격리시켜서 물 아래의 공간으로 만든 물 위의 세계다. 그러나 아오이가든과 큰 도시는 격리되었음에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누이의 배가 불러온 것은 바로 큰 도시 때문이다. 격리된 곳에 ‘병’으로 상징되는 숨겨야 할 폐해들을 밀어넣었지만, 그것은 도시의 양면이다. 더욱 큰 곳으로 갈수록 세계는 이들의 실존을 위협한다. 현실의 잔혹함은 이러한 도시괴담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맨홀」은 장 피에르 주네의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를 연상시킨다. 도시의 구석, 버려진 시궁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불친절하고 암울한 동화다. 단, 이들에게는 원과 같은 조력자가 나타나지 않으며, 미에뜨처럼 현명한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도시의 맨홀같은 구석,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자리에 우리 모두가 소름끼쳐할 거대한 불행이 살고 있다는 괴담은 흔한 상상력이다. 사회의 이면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가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들의 동화는 더욱 잔혹하게 끝난다. C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초능력은 C를 구원하기보다는 더욱 C를 시궁창에 밀어 넣는다. 눈을 감고 모든 걸 읽어낼 수 있는 것은 ‘통찰의 힘’으로 읽어낼 수 있다.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의 불합리한 점을 드러내는 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C는 자신의 신체 자체에 대한 결정권 역시 모두 잃어버린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 박제, 즉 죽어버린 경고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SF적 상상력은 SF가 드러내는 세기말적 결말으로 이야기를 몰아간다. 이 아이들이 해부되고 개조된다는 것 역시 괴담의 레퍼토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SF적 상상력이 디스토피아로 향하고 있을 때 일반적으로 그 상상력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회의 극단적인 발전이 불러오는 악영향에 대한 우려로 귀결된다. 편혜영은 악영향에 대한 우려 이전에, 현실의 사회가 보여주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 이면의 두려움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만국 박람회」의 경우는 그 사회의 이면에 드러나는 모순이 더욱 증폭된다. 수재민과 이재민들이 모여 있는 지옥같은 장소에서 국가는 끝내 만국 박람회를 열겠다고 선언한다.
정부는 수해 복구 약속을 하기도 전에 박람회 준비를 서둘렀다. 성공적인 박람회 개최는 수해로 먹칠이 된 이미지를 만회할 좋은 기회였다. 이로 인해 토목, 철강, 기계, 서비스 등 모든 업종이 혜택을 입을 거였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박람회 개최였다. … 나무뿌리라고 생각해서 잡아당겨 보니 구멍이 뚫린 인골이 나오기도 했다. … 그래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그만한 일에 공사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수재민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버려진 존재에 다름 아니다. 공사가 진행될수록 당연히 버려진 이들의 삶은 참혹해진다. 그들의 인간성은 필요한 자본과 이성적 사회의 사정 앞에 부정 당한다. 이들은 이미 이성적 사회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버려진 수재민들의 처지는 삼촌의 손에 죽어가는 개들에 비유된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완전한 소멸’을 겪는다. 사라진 원숭이가 갔던 그 무의 공간이다. 모든 버려진 것들이 무화한다. 드러난 세계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무화하거나 격리된 상태에서 일그러지는 이야기들이 강하게 독자를 위협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과연 현대적이고 이성적인 세계에 언제까지 남아있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던지기 때문이다. 도시괴담은 도시의 바로 뒤쪽에 붙어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다.
사회의 이면을 풀어낸다는 것은 일반 사회를 전복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괴담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냄으로써 작가는 현실에서 버려진 것들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다. 또한 누구라도 현실에서 버려지는 것들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시한다. 편혜영의 소설이 아닌 일상적인 괴담들의 생리도 그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버려진 세계는 언제라도 읽는 사람 그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평범하고 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버리면 과자를 주워먹는 거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이기도 하고(「저수지」), 언제라도 전염병의 위협으로 격리될지 모르는 인간이기도 하다(「아오이가든」).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결정하고 통제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거대한 권력은 수면 위의 세계로 존재하고, 단지 사람들은 그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해야 할 뿐이다. 편혜영의 괴담들은 그 세계에 편입하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를 끔찍한 환상으로 풀어놓음으로써 우리가 이 세계에서 당면한 진실을 바라보게 한다.
4. 김이환, 정소연 ― 장르문학과 현실참여
본격적인 장르문학들, 특히 그 중에서도 환상문학들의 경우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장르문학의 특성상 빠른 속도감과 적당한 가벼움으로 비판적 의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위에서 다룬 편혜영의 소설이나 백가흠의 소설, 또는 박민규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깊은 비관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본고에서는 김이환의 「미소녀 대통령」과 정소연의 「마산 앞바다」를 중심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장르문학과, 비판적 기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김이환의 「미소녀 대통령」은 이계진입물(異界進入物)이다. 어느 나라건 간에 미소녀들만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탤런트 문근영이다. 이시하라 사토미와 엠마 왓슨, 문근영이 한 자리에 앉아서 정치적 협력을 논하는 모습은 서브 컬쳐적 장난기가 엿보인다. 그러나 단순히 작가의 서브 컬쳐적 취미가 이들을 등장시킨 것은 아니다. 주인공은 고등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로봇에 탑승해서 괴물을 물리친다. 여기까지는 일상적인 장르문학의 논법을 따라간다. 그러나 주인공이 패러렐 월드를 지배하는 소녀 ‘롤리타’를 발견함으로써 이 소설은 일상적 장르문학에서 벗어난다. 무한히 많은 평행 우주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소녀는, 원래 있던 세계에서 포르노그라피를 찍으며 성적 착취를 당하던 약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소녀에게는 그 소녀에 저항하는 또 다른 착취의 힘이 존재한다.
이것은 현실의 법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착취를 당하는 자는 그 스스로가 세계를 바꿀 힘을 내재하고 있다. 포르노그라피를 찍던 소녀가 가지는 평행 우주를 조종하는 힘은 그 힘을 은유한다. 노동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그 착취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그 세계를 바꿀 힘은 계속해서 저항에 부딪힌다. 주인공은 착취하는 세계로의 편입과 연대 사이의 지점에서 아직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는 고등학생이다. 그리고 이제 선택의 길에서 그는 ‘연대’를 택한다. 로봇에 탑승해서 자신의 세계 밖으로, 더 위험할지도 모를 길을 선택한다. 성적 착취라는 극단적인 상황, 그러나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상황을 차용해서 더 넓은 세계로 연결시킬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독자 스스로가 현실에서 가지는 힘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게 한다.
정소연의 「마산 앞바다」는 죽은 사람이 림보 위에 보인다는 설정이 주축을 이룬다. 특별한 도시가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도시라는 점에서 괴담의 성격을 띌 가능성도 보여준다. 언제나 잃어버린 자들의 얼굴을 마산 앞바다에서 확인해야 하는 주인공은 생과 사의 경계를 계속해서 가깝게 느낀다. 죽은 자들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금기다. 생과 사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할 가치들이다. 생과 사의 명확한 구분과 함께 주인공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명확한 구분 앞에 맞닥뜨린다. 죽은 자들의 얼굴을 만난다는 사실은 고백할 수 없는 문제다. 동성애자라고 스스로를 밝히는 것은 죽은 자들의 세계와 산 자들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도전으로 주인공에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자리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주인공에게 그 경계는 과거에 사랑했던 소녀의 죽음으로 다가선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마산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소녀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인지한다. 그 소녀가 죽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서 주인공은 죽음이 생의 바로 곁에 존재한다는 걸 인정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긍정과 치유도 이루어낸다. 죽음이 그 자리에 존재하듯이 세상의 편견과 통념도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러나 생이 있다면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부정하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소설은 이야기 하고 있다.
세상의 편견에 대해 날을 세우면서도 그 세상 자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긍정하고 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Ⅲ 극대화한 모순과 변화의 잠재력
위에서 나는 명제와 반명제에 대해서 언급했다. 명제가 없는 반명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명제 역시도 분명한 명제의 반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환상은 현실의 맞은편에 존재한다. 현실에서 환상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환상은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현실을 비틀 수 있다는 것은, 그 안에 현실이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환상성은 현실을 전복할 힘 역시 가지고 있을 터이다.
특히나 2000년대에 와서 이러한 환상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무엇보다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는 사회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들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성질을 잃어가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시장의 자유와 자본의 자유는 사회에서 인간들이 인간적으로 살아갈 자유를 오히려 제약해 왔다. 이 세계에선 이기호의 표현대로 상상력이 부재한다. 단지 속물적으로 현실이 드러날 뿐이다.
환상성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이 인간들은 그 현실의 반대편에 속해있다. 현실에서 도태되거나 현실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현실이 포함하지 못하는 가장 인간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로 할 수 없거나, 말로 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순 뒤에 인간적인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이 세계는 현실적이지 못한 그 인간들을 가차없이 내친다. 그래서 환상은 ‘내침 당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환상이 현실을 전복하는 에너지로 기능하게 되는 건 바로 이 부분부터다. 그 내쳐진 인간들은 결코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사회 어딘가에 ‘환상’으로서 존재하게 될 뿐이다. 모두가 언제라도 내쳐질 수 있는 사회 속에서 모두는 환상성을 그 안에 내재하게 된다. 사회가 그들을 포함하지 않고 환상의 영역으로 남겨둘 때, 이 환상이야말로 사회의 억압을 깨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박민규의 소설 속에서 너구리만이 마운틴을 당한 주인공의 등을 씻겨줄 수 있었듯이.
그런 의미에서 환상성은 대중성과 맥을 같이 한다. 가장 환상적이지 못한 인간들이 가장 환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아남기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환상성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2000년대의 한국문학은 환상성을 잃어버린 이들 안에 이미 그 환상성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억압받는 인간들은 그 억압 속에 억압을 파괴할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부정은 단순한 부정이 아닌 긍정의 에너지를 낳는다.
작가로 다루기는 애매해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최근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열외인종 잔혹사』의 경우, 억압당하는 자의 환상이 어떻게 억압을 분쇄하는지를 비유적으로 명쾌하게 드러냈다. 극대화한 모순은 스스로를 파괴하게 마련이다. 환상성은 모순을 파괴하는 힘으로 2000년대 한국문학에 신선한 에너지를 제공했다. 전복되어야 할 모순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환상성으로 표현되는 이면의 힘 역시 그만큼 강해질 것이다. 세계화는 계속해서 가속되고 있고, 자본은 스스로를 불리는 걸 멈출 수가 없는 기제다. 신자유주의가 파산했지만, 그럼에도 자본주의 사회는 모순의 수레바퀴를 여전히 멈추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판타지와 한국문학의 미래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다양하게 기대할 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